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 한혜영

주선화 2024. 12. 21. 10:54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 한혜영
 
 
마디마디
이어 붙여야 하나의 이름을 갖는 것들이 있지
시간과 시간,
사건과 사건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들이 다 그렇지만,
 
철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
고통스럽게 끌고 다니던 척추를 부리고 있네
세월의 검은 뼈를 세느라
밤새도록 철커덕거리는 열차,
 
나는 지금 내 등에 깔린
무수한 침목(枕木)을 세며 가문을 달리는 중이라네
 
검은 입술을 가진 터널 입구에
아버지의 얼굴이 실패한 혁명군처럼 내걸리고
화통소리 한결 높이는 열차는
코끼리처럼 달려 아버지의 얼굴을 가차 없이 찢어버리네
 
하긴, 한낱 사소한
인생 때문에 역사가 멈출 수 없는 법이지
시간이란 때때로 물이고 불이고 바람이고 광기니까
마디마디의 낱말,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진 한 권의 책을 일으켜 세우는
아, 버거워 삐걱거리는 나의 척추여
 
누가 시대의 건반을 잘못 눌렸는가
 
한꺼번에 울음을 터트리는 내 마디마디의 뼈
지령도 밀명도 더는 오지 않는 이 시대의
외로운 혁명군인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는 중인가
 
 
 
모래인간들
 
 
  지하도로 쏟아져 들어가는 군중 속에서 나도
한 알의 뜨거운 모래로 휩쓸렸다
  목마른 사막을 뭉쳐 모래인간으로 만든 신이
사람의 도시로 보낸,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에는 고독이라는 유전자
가 각기 다른 내력으로 숨어 있다
  사막에 버려진 송장을 뜯으며 서럽던 개의 영
혼이 숨어 있고 죽은 새끼의 무덤을 다독거리
던 늙은 낙타의 울음소리가 스며 있고
  그곳을 떠돌다 몰락한 바람의 냄새가 배어 있

 
  이러한 주재료로 지어진 사람들은 태생적인
갈증으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거다
  그러다 광장에서 모래와 모래가 재회하면
  사막처럼 뜨거워져서 폭풍한테 배운 노래를
폭풍처럼 불러 젖히는 거다
 
  사막에서 온 줄조차 모르는
  승객들 틈에 나는 한 알의 모래로 골똘하게 앉
아 있었다
  도시의 숨통을 묶었다 끌렀다 하면서
  시간놀이를 즐기던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승
객들은 멱살이라도 집힌 것처럼 끌려오거나 떠
밀려 나갔다
 
  모이면 흩어지는 것 또한 모래의 운명이니
  그들은 어디로 가서 그날의 해변이 되거나 그
날의 사막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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