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97

애플 스토어 /이원 감상 / 성윤석

애플 스토어 ㅡ이원 숲이 된 나무들은 그림자를 쪼개는데 열중한다 새들은 부리가 낀 곳에서 제 소리를 냈다 다른 방향에서 자란 꽃들이 하나의 꽃병에 꽂힌다 늙은 엄마는 심장으로 기어 들어가고 의자는 허공을 단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신맛과 단맛이 뒤엉킬 때까지 사과는 둥글어졌다 감상 ㅡ성윤석(시인) 밀도가 충만하게 흐르는 시를 만나면 긴장하게 된다. 시인은 비디오테이프의 빠르게 감기나 되감기를 하다가 문득 정지 버튼을 누루는 것처럼 열중하게 하고 집중하게 하는 시인만의 언어를 갖고 있다. 시인은 '다른 방향에서 자란 꽃들이 하나의 꽃병에 꽂힌' 닫힘의 순간과 '의자는 허공을 단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는 열려있음의 순간을 동시에 배치하고 '같은 자리에서 신맛과 단맛이 뒤엉킬 때까지 사과는..

시선 2022.06.11

바다와 나 / 함성호 감상 / 성윤석

바다와 나 ㅡ함성호 늘 누워있기만 하던 바다가 어느 날에는 산처럼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나는 바지 속에 두 손을 넣고 어린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 그 심연을 올려다 보았다 너울나비 그 깊은 우물 속을 항해하는 정어리 떼 같은 은빛 울음으로 -나는 영영 알 수 없는 슬픔에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감상 ㅡ성윤석(시인) 읽히는 시가 있고 들리는 시가 있다. 이 시는 들린다. 노래처럼. 신화와 우주적인 세계를 탐구해 온 이 시인은 '누워 있는 바다'를 일어서게 하고 그 심연을 올려다 본다. 너울나비 같은 물결, '정어리 떼 같은 은빛 울음'의 바다 윤슬을 보며 시인은 바다의 시원과 바다의 슬픔을 노래한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시인이 숙명처럼 바다를 노래할 때 새삼 시가 말놀이가 ..

시선 2022.06.01

채송화가 한창입니다 / 김영미 감상 / 곽재구

채송화가 한창입니다 ㅡ김영미 '눈길이 멀면 명길 짧다'는 할머니 말씀이 피었다 노랑 저고리 분홍 치마 입으신 할머니 어린 눈에 할미가 하늘만큼 이뻤다 낮은 산에 산 채송화 하늘이 멀었다 여름 속을 뛰어든 꽃씨 저 세상으로 든 그 저녁 씨 뿌리지 않은 마당에 안티푸라민 냄새가 나를 업었다 감상 ㅡ곽재구 눈길이 멀면 명길이 짧다. 평범한 우리네 어르신들의 말씀이다. 세상 사는 이치가 새록새록 스며 있습니다. 높은 뜻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이는 평탄한 삶을 꾸리기 힘듭니다. 대충 눈 감고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마음속에서야 어찌 '눈길이 먼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고 싶지 않겠는지요. 채송화는 키가 작은 꽃입니다. 마당 앞이나 장독대 주위에 분홍색 노란색 빨간색 흰색으로 핍니다. 한국인 마음속의 ..

시선 2022.05.27

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해설 / 최형심

표류하는 독백 ㅡ강재남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

시선 2022.05.18

환상의 빛 / 강성은 해설 / 최형심

환상의 빛 ㅡ강성은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 세익스피어 해설 ㅡ최형심(시인) 살다 보면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때가 있..

시선 2022.05.14

분홍강 / 이하석 감상 / 나민애

분홍강 ㅡ이하석 내 쓸쓸한 날 분홍강 가에 나가 울었지요, 내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 가에 고기떼 햇빛 속에 모일 때 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 당신은 따뜻했지요. 한때 우리는 함께 이곳에 있었고 분홍강 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있을 때나 웃음은 웃음과 만나거나 눈물은 눈물끼리 모였었지요. 지금은 바람 불고 찬 서리 내리는데 분홍강 먼 곳을 떨어져 흐르고 내 창 가에서 떨며 회색으로 저물 때 우리들 모두 모닥불과 하나님들은 다 어디 갔나요? 천의 강물 소리 일깨워 분홍강 그 위에 겹쳐 흐르던, 감상 ㅡ나민애(문학평론가) 강은 바다와 다르다. 같은 물이래도 바다는 보다 원초적인 자연이다. 그에 비해 사람 가까이에 사는 강은 사람을 많이 ..

시선 2022.05.05

뒤편 / 천양희 감상 / 나민애

뒤편 ㅡ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감상 ㅡ나민애(시인) 'passion'이라는 단어는 열정이라는 뜻이다. 누구든 열정이 좋다고 알고 있지만 이 단어에는 반전이 있다. 여기에는 고통, 그리고 수난이라는 뜻도 함께 있다. 우리는 간절히 갈망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말이다. 때로는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위험하다.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깊은 상처를 준다. 맞다. 소중한 사람은 가히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혹시라도 소중한 사람이 망가질까 두렵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받을까 두렵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

시선 2022.04.28

통영 / 도종환 감상 / 박준

통영 ㅡ도종환 당포 앞바다는 나전칠기 빛이었다 돌벅수 둘이 저물면서도 전복 껍데기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장승이지만 입술 오목하게 오므리고 웃는 눈자위가 순해서 좋았다. 섬 사이로 섬이 있었다 굳이 외롭다고 말하는 섬은 없었다 금이 가지 않은 바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처를 특별히 내세우는 벼랑도 없었다 전란도 있고 함정도 있고 곡절 많은 날들도 있었지만 그게 세월이었다. 윤이상도 이중섭도 그걸 보고 갔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았을 저녁바다를 나도 망연히 바라본다 통영에는 갯벌이 없다 바위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많이 움직여야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건 어류들만이 아니었다. 통영에 다녀온 뒤로는 해수욕장이 늘씬한 해안보다 고깃배가 달각달각 모여 있는 바닷가 마을이 좋았다 밀려오는 바다 밀려가는 세..

시선 2022.04.26

곡우 / 정우영 감상 / 김정수

곡우 ㅡ정우영 봄비 그치자 아침 이내 포근포근 산자락이 감아돈다. 느른하고 불안하다. 이런 날이면 천선 누옥(漏屋)의 우리 어머니, 육탈의 가벼운 몸 또 근질근질하실 게다. 천명(天命)도 아랑곳없이 떨쳐 일어나 요정처럼 날래게 묵정밭을 일구실 게다. 어허, 저기. 천산에서 뜯어 흩뿌리는 모정(母精)이 무지개 되어 훨훨 땅바닥에 날아내린다. 눈이 부셔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너무 환해서 비릿한 눈물 번진다. 감상 ㅡ 김정수(시인)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 이 무렵 내리는 비는 생명을 움트게 한다. 잠자던 곡물은 깨어나고, 나무는 몸에 물을 가득 채워 싹을 틔운다. 농부는 볍씨를 물에 담그고 못자리를 준비한다. 한해 농사의 시작이다. 봄비 그친 아침, 앞산에 푸르스름하고 흐릿..

시선 2022.04.20

단맛에 빠지다 / 오서윤 감상 / 김부회(시인)

단맛에 빠지다 ㅡ오서윤 입에서 당겨 자꾸 생각나는 단맛은 뒷맛이 깔끔해서 이별하는 날 딱, 좋다 진저리 처질수록 더 좋다 커피는 언두의 단맛에 따라 등급과 추출방식을 나누고 미혹과 중독을 적극적으로 변명한다 케이크나, 초콜릿, 캔디처럼 사랑을 주고받는 것들은 혀 앞쪽 단맛 위치처럼 편의점 앞자리를 차지하지만 변심이나 증오에 흔들리기 쉬운 탓에 신을 처음 배반한 맛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이 그중에 제일이라 한 말씀에 가장 가까워 단맛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위로이다 단내 풍기는 하루를 보내고 쓴맛과 짠맛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단맛으로 돌아가는 이유이다 감상 ㅡ김부회(시인) 시 본문 중 위로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상대방을 향한 위로도 있지만 가장 큰 위로는 자신에 대한 위로다. 단맛을 느끼기 위해 중요한..

시선 2022.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