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97

봄날 / 송창우 감상 / 성윤석

봄날 ㅡ송창우 이 섬에서 저 섬으로 가는 일곱물에는 가고 열물에는 못가는 길 해신당 밑 달랑게는 날마다 천탑 만탑 무너질 탑을 쌓고 떠나간 사람의 발자국마다 청개비는 푸른 알을 낳고 홍개비는 붉은 알을 낳고 문득 저 섬에 가면 십분 거리인데도 십 년이나 만나지 못한 사람 만날 것 같아 손가락 손가락마다 물때 짚으며 동백꽃을 깔고 앉은 봄날입니다. 감상 ㅡ성윤석 고향 가덕도의 봄날을 그린 시인은 창원 산골 오지에 목조주택을 짓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산다. 가덕도는 더덕이 많이 난다. 해서 가덕도라 했다지만 '청개비는 푸른 알을 낳고 홍개비는 붉은 알을 낳는' 섬이다. 그 섬에 가면 '십분 거리인데도 십년이나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만날 것 같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고향에서 한 사람을 생각하며, 시인..

시선 2022.04.13

원동시편 9 / 고영조 감상 / 나민애

원동시편 9 ㅡ간이역 ㅡ고영조 작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작은 것은 몸으로 봅니다. 내 몸이 머무는 곳에 보랏빛 제비꽃은 피어 있습니다. 언덕 아래 몸을 숨기고 원동역은 아득히 그곳에 있습니다. 감상 ㅡ나민애(문학평론가) 원동역은 원동마을에 있다. 간이역이라고 하니 교통의 요충지는 아니다. 간이역을 품고 있는 원동마을도 변화한 곳은 아닐 것이다. 여행 좀 다녀본 사람들은 그곳을 아름답다고 평한다. 특히 봄에는 매화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과 구름처럼 피어난 매화는 이 시에 없다. 이 시인은 매화가 아니라 원동역 그 자체를 보고 있다. 매화가 피든, 피지 않든 시인에게 원동역은 그저 원동역이다. 관광지의 하나가 아니라 오래 그곳에 있어 온 간이역, 시인은 분명 그 소..

시선 2022.04.05

진실 혹은 거짓 / 서형국 감상 / 성윤석

진실 혹은 거짓 ㅡ서형국 남자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가 있었다 물을 주지 않아도 시들지 않는 나무 협상을 합시다 내 수중엔 이틀을 버틸 술값이 있고 당신은 나와 흥정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나는 오래 살고 싶고 명예를 갖고 싶으며 후손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소 단,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남의 불행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빈틈없는 제안이었다 날이 밝아 탁자엔 퇴고를 마친 원고 뭉치 위로 한 뼘이나 길어진 나무의 그림자가 꼭 두 잔이 모자랐던 술병을 끌어안고 연리지로 뻗어 있었다 세월이 흘렀고 남자는 헌책방에서 간간이 펼쳐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완벽한 거래였다 감상 ㅡ성윤석(시인) 현대 시인들은 누구라도 김수영이나 백석은 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시인이 수만 명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잠시 나타났다가..

시선 2022.04.04

길을 걷다 / 김종해 감상 / 김성춘

길을 걷다 ㅡ김종해 아침 산책길에 혼자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꼬부랑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 걸어가는 뒷모습 보는 동안 어느새 그 사람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나에게 얼마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겐 병들지 않은 몸과 지팡이 없이 걸어 갈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음을 고맙다, 고맙다고 하늘에 기도하듯 입속말 하며 나는 천천히 걷는다 어제부터 세상속의 허상(虛像)을 좇아온 나의 보법(步法)은 너무 단순하다 걷는 길 어디에서나 허방이 따라 오고 사는 곳 어디에서나 참회가 필요했다 아침 산책길 위에 감상 ㅡ김성춘(시인) 세상은 온통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같은 코로나 사태와 3월9일 운명의 대선과 북한 미사일 사건 등으로 뉴스 몸살을 앓고 있다. 시인들은 독자들에게 좋..

시선 2022.03.25

삼월 / 박서영 감상 / 성윤석

삼월 ㅡ박서영(1968 ㅡ 2018) 꽃잎들은 긴 바닥과 찰나의 허공이라는 계절을 지나는 중이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왜 그리 짧게 살다 떠나는지. 변하고 돌아서는지. 무덤 속에서 튀어 올라오는 사랑과 입맞춤을 한다. 나는 북쪽에 살아. 피부는 들판의 풀들처럼 자라면서 늙어가고, 가끔은 잠적하지. 그리곤 튀어오르지. 무덤 위에 피는 꽃처럼 잠시 아름다워지기도 해. 생일(生日)과 기일(忌日 )이여. 점점 더 멀어져라. 나의 울음과 너의 울음이 다르다. 저녁과 아침 사이 밤이여. 점점 더 캄캄해져라. 나는 남쪽에도 살고 북쪽에도 산다. 꽃 피고 지고. 밤하늘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다. 바닥에 흐르는 은하수. 바닥의 애벌레좌. 얼룩진 한쪽 벽 구석의 거미 좌. 이젠 천천히 기어 너에게 간다. 길의 점막에 달라붙..

시선 2022.03.23

물 / 김안녕 감상 / 허연

물 김안녕 아끼던 물병을 어디 두고 왔는지 기억이 없네 유용하다고 말했지 아낀다고 했었지 아끼는 사람을 어디 두고 왔는데 알 수 없네 어느 틈에 어느 옛날에 목이 마를 때, 그제야 너를 잃었다는 그 생각 감상 ㅡ허연(시인) 입으로는 유용하다고 아낀다고 말하면서도 실상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 것들이 많다. 늘 가까이 있어 주기에 오히려 소중한 줄 모른다. 시인은 잃어버린 물병을 통해 소중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무심함을 일깨운다. 아낀다고 말만 해 놓고 물병을 잃어버렸다. 어디에 두고 온 지도 모른다. 늘 물병이 당연히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목이 마르자 그제야 깨닫는다.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시선 2022.03.22

나무와 하얀 뱀이 있는 숲 / 김혜영 감상 / 이규열

나무와 하얀 뱀이 있는 숲 ㅡ김혜영 얼음을 주세요 입술에 물집이 부풀고 이마가 뜨거워요 눈 먼 약사처럼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려요 비늘이 돋아나요 나의 방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하얀 뱀, 혀에 불이 났어요 비밀의 숲은 떠올라요 얼음을 주세요 당신의 숲은 두터운 갑옷을 입고 태양과 싸우지요 오븐의 식빵은 부풀고 제발, 얼음으로 빚은 계절을 데려다줘요 북극성에서 쏟아지는 별똥별 검은 늪에 떠 있는 새 거품으로 변하는 나의 방, 촛불을 꺼주세요 부활은 아직 멀었어요. 꽃의 입술에 뱀의 혀가 닿고, 숲 하얀 뱀을 따라 나의 방에 이슬이 떨어져요, 숲, 숲, 감상 ㅡ이규열(시인) 가상현실이 만드는 정신세계와 일상을 엮어가는 정신세계의 차이는, 갈수록 좁혀지고 그 틈새에서 문학의 역활은 커져간다. 진짜(실제)와 가짜(..

시선 2022.03.18

이른 봄 / 이규리 감상 / 반칠환(시인)

이른 봄 ㅡ이규리 그분하고 같은 된장찌게에 숟갈을 넣었을 때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었다 냄비 안에서 숟갈이 부딪혔을 때 그렇게 아득할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딩딩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것이 끝이라 해도 끝 아니라 해도 다시 된장찌게에 숟갈을 넣었을 때 하얗고 먼 길 하나 휘어져 있었다 같은 아픔을 보게 되리라 숟가락이 다 해지리라 어떻게 되든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한 숟갈이 다가와 연(緣)을 두었고 슬픔을 결심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아련히 더듬어 가보는 그 햇빛 속 수저 소리 흐릿하게 남아 있던 그 점심나절에 내 일 모르듯 벙글던 흰 꽃들 아래에 감상 ㅡ반칠환(시인) 두 숟가락 모두 놀랐을 것이다. 캄캄한 찌게 속에서 맞부딪치는 순간, 해야 할 일이 단순히 국을..

시선 2022.03.17

오버 / 이윤설 감상 / 정채원

오버 ㅡ이윤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버 널 떠나기로 했다 오버 엔진이 툴툴거리는 비행기라도 불시착하는 곳이 너만 아니면 된다 오버 열대 야자수잎이 스치고 바나나 투성일 거다 오버 행복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오버 죽이 끓고 변죽이 울고 이랬다 저랬다 좀 닥치고 싶다 오버 원숭이 손을 잡고 머리 위 날아가는 새를 벗 삼아 이구아나처럼 엉금엉금이라도 갈 거다 오버 왜 그렇게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해지도록 사랑했을까 오버 사랑해서 주름이 돼버린 얼굴을 버리지 못했을까 오버 엔꼬다 오버 삶은 새로운 내용을 원하였으나 형식 밖에는 선회할 수 없었으니 떨어지는 나의 자세가 뱅글뱅글 홀씨 같았으면 좋겠다 오버 그때 네가 태양 같은 어금니가 반짝 눈부시도록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오버 지구는 속눈썹으로부터 흔들리..

시선 2022.03.14

행복 / 심재휘 감상 / 김정수

행복 ㅡ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감상 ㅡ김정수(시인) "힘내세요!" 전에는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하며 건네던 말이지만 힘내라는 말보다 힘을 달라는 반응 이후엔 꺼리게 됐다. 때로 한마디 말이 많은 위로가 되지만 절박한, 특히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심을 담은 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이나 마음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 시인은 외출하는 아들에게 무심코 "보람찬 하루" 라는 말을..

시선 2022.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