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97

볼레로 / 조창환 감상 / 전영태

볼레로* ㅡ조창환 희미한 공기 덩어리가 걸어온다 안개를 헤치고, 피리 소리들이 걸어온다 푸른 스카프를 걸친, 홰나무들이 걸어온다 열린 문(門)들에서, 구름의 신발들이 걸어온다 닭털 모자들이 걸어온다 젖은 전류(電流)들이 걸어온다 강철로 된, 비탈이 걸어온다 유황(硫黃)과 산(酸)이 걸어온다 황금(黃金)빛, 기관차가 달려온다 불과, 파도와, 수증기와 깃발들이 걸어온다 *라벨의 볼레르 감상 ㅡ전영태(문학평론가) 시인들은 음악을 시 작품화하면서 음악의 구성과 멜로디와 리듬의 변화, 화성과 변조에 유의하여 최대한 음악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시와 음악의 관계에 집중하여 음악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걸어온다'는 아홉 번 각 행마다 반복되다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 행만 생략된 뒤 끝행에서 열 번째 반복되며..

시선 2022.03.03

따뜻한 사전 / 이향란 감상 / 박미산

따뜻한 사전 ㅡ이향란 그대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것처럼 친구와 다정히 어깨동무하고 걷는 것처럼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는 것처럼 허공의 나비를 고운 눈길로 이끄는 것처럼 큰 키의 나무를 선선히 올려다보는 것처럼 하늘에 떠있는 것들이 노래 부르는 것처럼 오지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처럼 불을 지피듯 반짝거리는 낱말, 낱말들의 따뜻한 집 감상 ㅡ박미산(시인) 깊은 산속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 줄줄 흐르는 개울물처럼 이제 막 눈을 뜨는 버들개지처럼 기지개를 켜고 꽃망울 터트릴 준비 하고 있는 목련처럼 죽은 듯 서 있는 나무속에 숨어 연둣빛 이파리를 언제 내밀까 두근거리는 잎새처럼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던 까치가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시선 2022.02.28

공부 / 유안진 감상 / 곽재구

공부 ㅡ유안진 풀밭에 떼 지어 핀 꽃다지들 꽃다지는 꽃다지라서 충분하듯이 나도 나라는 까닭만으로 가장 멋지고 싶네 시간이 자라 세월이 되는 동안 산수는 자라 미적분이 되고 학교의 수재는 사회의 둔재로 자라고 돼지 저금통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자랐네 일상은 생활로, 생활도 삶으로 자라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도 오랜 공부가 필요했네 배우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미적분을 몰라도 잘 사는 이들 잘 살아서 뭣에다 쓰게 쓸 데가 없어야 잘 산다는 듯이 꽃다지들 저들끼리 멋지게 피어 웃네 감상 ㅡ곽재구(시인) 샛강에 산당화꽃이 피었습니다. 아침 햇살 스민 연분홍 꽃잎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살아온 시간 부끄러워집니다. 내가 쓴 시들 모아 즙을 짜낸다 해도 저 순결한 꽃..

시선 2022.02.24

빛멍 / 이혜미 감상 / 나민애

빛멍 ㅡ이혜미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이었다. 감상 ㅡ나민애(문학평론가) 움베르토 에코의 책 '미의 역사'에 따르면 중세의 예술은 빛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대성당의 창유리를 통해 빛이 내부로..

시선 2022.02.23

정의 / 이재훈 감상 / 김정수(시인)

정의 ㅡ이재훈 수풀에 있었다. 가잘 낮은 곳에서 숱한 위험을 만났다. 혐오스러웠고 추했다. 돈과 권세가 있으면 죄가 없단다. 늘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수풀. 악인들의 말로에 대해. 저 높은 단상의 말로에 대해 어지러운 소문들만 들어야 한다. 수풀은 파괴되지 않는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더러운 짐승이 된다. 수풀 속에서 다리를 감싸안고 울었다. 풀잎들이 흔들렸다. 풀잎에 빗방울이 간신히 붙어 있다. 빗방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흘러내려 사라졌다. 새로운 빗방울이 또 고인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이 질긴 운명. 피를 머금고 있는 빗방울. 수풀에 있었다. 아침햇살까지 야속한 수풀에 있었다. 금방 고이다 사라지는 수풀에 있었다. 거짓말이 수풀에 가득했다. 감상 ㅡ김정수(시인) 100m 달리기 시합을 하는..

시선 2022.02.21

아득한 거리 / 김 참 감상 / 박준(시인)

아득한 거리 ㅡ김 참 강변으로 내려가는 계단 소나무 아래 버려진 풍금, 누가 풍금을 소나무 아래 버려놓았나. 지독하게 쏟아지는 햇살 피해 소나무 그늘에 서서 강을 바라보네. 구름이 지나가는지 사방이 그늘로 덮이네. 강변도로로 양파 실은 트럭이 지나가네. 트럭이 지나가자 사방이 고요해지고 풀벌레 소리 시끄럽게 들려오네. 하늘엔 하얀 구름, 하얀 구름 떠 있고 강 건너 공장 지붕 뒤로 키 큰 미루나무 두 그루. 풍금과 소나무 사이에 서서 나는 강 건너편을 바라보네. 공장 옆 숲의 느티나무들 폭염에 묵묵히 견디며 서 있네. 느티나무 아래서 버려진 풍금 옆에서 강 건너 숲을 보는 나를 아득히 바라보네. 감상 ㅡ박준(시인) 어느 강변입니다. 둔치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고요. 시의 주인공은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소..

시선 2022.02.15

육탁 / 배한봉 해설 / 김종훈(문학평론가)

육탁 ㅡ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 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

시선 2022.02.10

못다 한 말 / 박은지 감상 / 김정수

못다 한 말 ㅡ박은지 설원을 달렸다 숨이 몸보다 커질 때까지 숨만 쉬어도 지구 반대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너를 보는 게 좋았다 여기 너무 아름답다 우리 꼭 다시 오자 겨울 별자리가 가고 여름 별자리가 올 때까지 녹지 않는 것이 있었다 감상 ㅡ김정수(시인) 어떤 말은 미안해서, 어떤 말은 부끄러워서, 어떤 말은 불편해서, 어떤 말은 너무 늦어버려서 할 수가 없다. 가까운 사이라 더 속말을 꺼내놓기 어려운 경우도있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풀어놓는 게 편할 수도 있다. 선의로 한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여 관계가 틀어지기도 한다. 감정이 섞인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다. 그 가시를 삼키면 내가 다치고, 내뱉으면 상대가 다친다. 못다 한 말이 쌓여 몸과 마음을..

시선 2022.02.07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감상 / 허연(시인)

흔한 낙타에 대한 ㅡ김미옥 햇살을 등에 꽂고 낙타가 걷는다 무심한 혀로 콧구멍을 핥는다 나는 편안히 앉아 익숙한 비애를 본다 와이드 화면 속 모래바람은 회오리 치고 열 받은 팝콘은 지리멸렬 터진다 낙타는 우스꽝스럽게 울지만 눈물을 저장해 놓고 가볍게 씹는 법을 안다 단내가 화면 밖으로 품어 나온다 지긋이 눈 뜬 낙타의 검은 망막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뜨거운 혹 만년을 이고 다녀도 긴 눈썹 한 번 깜빡이면 화면이 바뀐다 마른 오아시스에는 오늘도 불굴을 되새김질하는 흔한 낙타가 있다. 감상 ㅡ허연 (시인) 여행지에서 낙타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너무나 예뻤고 너무나 슬펐다. 사막에 적응하면서 만들어진 수천만 년 된 슬픔이었다. 낙타는 무슨 고행의 동물처럼 느껴진다. 모래바람 속에서 모 든 걸 참아..

시선 2022.02.03

그들 / 오은 감상 / 전해수

그들 ㅡ오은 사람처럼 말하네 꼭 사람 같네 그건 욕이었다 사람만큼 아름답네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네 그건 신기루였다 사람인 줄 알았네 10년 감수했네 그건 진심이었다 사람이어서 다행이고 사람이 아니어서 더 다행한 첫차는 어제치 피곤을 싣고 들어오고 막차는 오늘치 피곤을 나르듯 떠난다 감상 ㅡ전해수(문학평론가) 오은의 시 「그들」은 삶의 무게로 눌린 "사람"의 존재를 더듬는다. "사람"처럼 말하니 꼭 사람 같으나 "사람"처럼 살긴 틀렸다는 존재를 향한 시원(始原)과 함께 규정된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 오은의 시에서 희생의 대상은 "사람"에 있다. 그러나 "사람"이어서 다행인 줄 알았더니 "사람"이 아니어서 더 다행한 세계의 곡절에 우리의 판단은 유보된다. 다만 "욕"과 "신기루"와 "진심" 사이에서 다행한 ..

시선 2021.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