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시집 / 구재기
낙오된 새
수천 킬로 날아온 새가
대열에서 낙오가 되면
텃새처럼 계절을 모르게 된다
앞장 서 날아간
허공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고
생각보다 일찍 지나가버린 바람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모습을 바꾸는 구름처럼
안간 힘을 다 쏟아내도
몸무게의 변함은 없다
군계일학을 꿈꾸어 보아도
누구 하나 쉽게 눈을 돌려주지 않는다
살아가는 게 이다지도
절해고도인 줄 알았더러면
가다가 쓰러져도 날개를 접지 말 것을
물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두 날개로 물너울을 일으켜 보아도
몸뚱이 어느 곳 한 곳
어디 물 한 방울 젖어들지 않는다
메마르고 굳은 몸 하나로
온갖 깃에 칼날을 꽂아놓고
속 터지게 살아갈 날들이
자꾸만 쌓여갈 뿐이다
내년쯤 다시 대열에 끼어든다 하여도
알아볼 식솔이나 살아 있을까
보물
박물관에서
속 찬 그릇 하나
본 적이 없다
빈 그릇들
모두 천 년을 살아온
보물들이라 했다
破竹之勢
바람부는 방향대로
대나무는 온몸을 굽힌다
푸른 몸을 세우는 데에
굽히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습기 찬 언덕 황토 밑으로
핏줄기 같은 뿌리마다 매듭을 짓고
몸을 지탱하는 굵은 마디 마디
흔들리는 것도 몸을 굽히는 것도
태어나고 자라난 자리에서
속을 비워 바람을 모으다 보면
천년을 견디어온 피리소리가 난다
언제 어디서나
제 몸의 아픔을 모르겠는가
칼끝에 닿으면
아픔이 쾌감처럼 빗줄기를 타고
자해하는 속도를 멈추지 않는
이 거대한 기세여, 청랑한 소리여
푸르게 산다는 것이
바람의 방향을 향하여
몸을 굽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바람 앞의 대나무에게는 시방
푸른 것에 따르지 않고
곧은 것에도 말미암지 않는 것
땅 속 깊이 핏줄기처럼 벋어가서
마디마디 비워가며 살아갈 뿐이다
바람 불어
피리소리 한층 높아지던 날
재목이 못되어도
천수는 누릴 수 있는 것
속이 비어 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
칼날을 지나는 과속의 쾌감이
한줄기 빛으로 짱, 스치자
대숲의 바람이 움칠 멈추고 만다
젖는 새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빨랫줄에 앉아
겨울비에 젖고 있다
이따금 날개를 퍼떡이며
젖은 몸을 털어내고 있다
예까지 날아오기까지
수백 만번은 더
날개를 퍼떡여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젖는 새에게는
날아온 길이 보이지 않고
앞을 바라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부리를 굽혀
날개 밑에 스며든
한 방울 추위를 뽑아내어도
몸이 추우니 더욱
식솔의 기억이 높아질 뿐이다
자꾸만 날개를 퍼떡여
뜨거운 피를
온몸에 돌려보지만
식어가는 체온은 여전히 춥다
비 그칠 기색도 없는
한겨울 오후, 새 한 마리
무슨 까닭에서인지
빨래줄에 앉아
진종일 몸을 젖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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