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신작소시집 / 구재기

주선화 2010. 7. 4. 12:31

신작소시집 / 구재기

 

낙오된 새

 

 

수천 킬로 날아온 새가

대열에서 낙오가 되면

텃새처럼 계절을 모르게 된다

 

앞장 서 날아간

허공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고

 

생각보다 일찍 지나가버린 바람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모습을 바꾸는 구름처럼

안간 힘을 다 쏟아내도

몸무게의 변함은 없다

군계일학을 꿈꾸어 보아도

누구 하나 쉽게 눈을 돌려주지 않는다

 

살아가는 게 이다지도

절해고도인 줄 알았더러면

가다가 쓰러져도 날개를 접지 말 것을

 

물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두 날개로 물너울을 일으켜 보아도

몸뚱이 어느 곳 한 곳

어디 물 한 방울 젖어들지 않는다

 

메마르고 굳은 몸 하나로

온갖 깃에 칼날을 꽂아놓고

속 터지게 살아갈 날들이

자꾸만 쌓여갈 뿐이다

내년쯤 다시 대열에 끼어든다 하여도

알아볼 식솔이나 살아 있을까

 

 

 

보물

 

 

박물관에서

속 찬 그릇 하나

본 적이 없다

 

빈 그릇들

모두 천 년을 살아온

보물들이라 했다

 

 

 

破竹之勢

 

 

바람부는 방향대로

대나무는 온몸을 굽힌다

푸른 몸을 세우는 데에

굽히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습기 찬 언덕 황토 밑으로

핏줄기 같은 뿌리마다 매듭을 짓고

몸을 지탱하는 굵은 마디 마디

흔들리는 것도 몸을 굽히는 것도

태어나고 자라난 자리에서

속을 비워 바람을 모으다 보면

천년을 견디어온 피리소리가 난다

 

언제 어디서나

제 몸의 아픔을 모르겠는가

칼끝에 닿으면

아픔이 쾌감처럼 빗줄기를 타고

자해하는 속도를 멈추지 않는

이 거대한 기세여, 청랑한 소리여

 

푸르게 산다는 것이

바람의 방향을 향하여

몸을 굽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바람 앞의 대나무에게는 시방

푸른 것에 따르지 않고

곧은 것에도 말미암지 않는 것

땅 속 깊이 핏줄기처럼 벋어가서

마디마디 비워가며 살아갈 뿐이다

 

바람 불어

피리소리 한층 높아지던 날

재목이 못되어도

천수는 누릴 수 있는 것

속이 비어 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

칼날을 지나는 과속의 쾌감이

한줄기 빛으로 짱, 스치자

대숲의 바람이 움칠 멈추고 만다

 

 

 

젖는 새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빨랫줄에 앉아

겨울비에 젖고 있다

이따금 날개를 퍼떡이며

젖은 몸을 털어내고 있다

예까지 날아오기까지

수백 만번은 더

날개를 퍼떡여 왔을 것이다

그러나 젖는 새에게는

날아온 길이 보이지 않고

앞을 바라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부리를 굽혀

날개 밑에 스며든

한 방울 추위를 뽑아내어도

몸이 추우니 더욱

식솔의 기억이 높아질 뿐이다

자꾸만 날개를 퍼떡여

뜨거운 피를

온몸에 돌려보지만

식어가는 체온은 여전히 춥다

 

비 그칠 기색도 없는

한겨울 오후, 새 한 마리

무슨 까닭에서인지

빨래줄에 앉아

진종일 몸을 젖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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