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관음이라 불리는 항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주선화 2011. 1. 4. 10:34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 송찬호

 

                                                          

 

무릇 생명이 태어나는 경계에는

어느 곳이나

올가미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에

저렇게 떨림이 있지 않겠어요?

 

꽃을 밀어내느라

거친 옹이가 박힌 허리를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저 늙은 동백나무루를 보아요

 

그 아득한 올가미를 빠져나오려

짐승의 새끼처럼

다리를 모으고

세차게 머리로 가지를 찢고

나오는 동백꽃을 이리 가까이 와 보아요

 

향일암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도

검푸른 잎사귀로

그 어린 꽃을 살짝 가려주네요

그러니 동백이 저리 붉은 거지요

그러니 동백을 짐승을 닮은 꽃이라 하는 것 아겠어요?

 

 

 

 

출전 /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동백은 겨울에 피는 꽃이지요. 얇은 꽃잎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디는 붉은 꽃을 보고 송찬화 시인은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동백이 활짝). 생명을 위협하는 겨울과 싸우다 뚝뚝 떨어지는 동백은 여성에 비유되는 꽃이 아니라 "짐승을 닮은 꽃" 입니다. 꽃을 밀어내려고 "허리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동백나무에서도 짐승의 신음소리가 나올 것 같죠?

헤쳐 나가기 힘든 일을 겪을 때면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죠.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은 그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 올가미 같은 시간을 지나, 다시 새해가 떠올랐습니다. "세차게 가지를 찢고 나온" 동백꽃의 기운을 받아 새해를 힘차게 시작해 보시지요.

 

                        

 

 

 

'마음에 드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냥꾼의 노래 / 문정희  (0) 2011.03.04
꽃은 언제나 진다 / 김종미  (0) 2011.02.16
만월 / 신덕룡  (0) 2010.12.23
첫사랑 / 문성해  (0) 2010.12.21
문어 / 문정희  (0) 201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