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18년 신춘문예

주선화 2018. 1. 25. 15:31

돌의 문서

                        이린아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의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미륵을 묻다

                       김형수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 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는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를 한 천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의 기록


아,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크레바스에서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 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 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잘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을 약해요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서 온 많은 여행지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서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 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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