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개의 골목
유성임
모로코의 옛 수도 페스
길의 혈관들, 만 개의 핏줄로 뻗어있었다
간간이 스쳐가는 나귀등에 아비와 아들이 앉아있고
어미는 나귀의 끈을 잡고 느릿느릿 미로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붉은 양귀비가 바람에 흔들리는 날이었다
하늘이 푸른 물빛 같아, 나귀의 출렁거림도 누추한 가난마저도
선명한 풍경이 되는 곳
어깨를 스치듯 그렇게 이방의 시간은 곁을 지나갔다
아련한 아잔*소리와 함께 날아온 염색공장의 가죽냄새
문득, 끈을 붙잡은 여인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악취에 물든 가업이 골목을 붙잡고 그들은 이곳에서 늙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곳, 기울어진 생의 각도는
만 개의 뿌리를 가진 골목으로 휘어있었다
이 협곡으로 급류처럼 흘러간 시간들
골목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시작과 끝이 없는 미로에 갇혀 늙어갔다
길잡이를 따라 정신없이 그곳을 빠져나와 뒤돌아보니
입구와 출구는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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