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그림 없는 미술관 / 주민현

주선화 2021. 3. 1. 14:38

그림 없는 미술관

 

ㅡ 주민현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을 거닐며

당신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구 저편에 있는 그림 없는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어요

 

미술관에 그림이 없다면

무엇이 전시될까요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진다면

작고 약한 것부터 무릎 꿇리게 될까요

 

그림 없는 미술관을 상상하다가

이 모든 것이 삶에 관한 은유라는 것을 깨닫고

 

밖에 불이 났나 봐요

소방차가 왔으나 아직은 하늘이 거무스름하고

 

나는 창 안에서 개를 안고 있어요

개는 따뜻하고

인간을 맹목적으로 믿는 듯이

 

맹목적인 따뜻함

 

개를 사랑하지만 양을 먹어요

소를 입고요 말은 탑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타오르던 하늘이 걷히고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가볍게 눈 내린 아침에

인공눈물, 인공항문, 인공지능, 그 모든 인공에 대해 생각하다가

 

가볍게 내린 것들은 가짜 같군요

 

역 안에는

구찌 샤넬 루이비통 없는 게 없고 거품에는 표정이 있고

가품은 흥미로와요

 

쉽게 구겨지는 쪽으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직하고

 

우리의 자동차, 모피코트, 개들의 움직임

언제나 새들은 가볍게 날아오르고

 

엔진이 꺼진 곳에서 숨 쉬고 있는 작은 동물을 깨워

차를 몰고 도착하는 그곳에서

 

늙은 개는 아주 인간적인 미소를 띄고

 

프레임 없는

뒤바뀐

프레임을 초과하는

부정하는

뒤틀린 그림

아닌 그림 속으로

우리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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