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없는 얼굴로 오래 울었다 / 이 향

주선화 2021. 3. 7. 11:02

없는 얼굴로 오래 울었다

 

ㅡ 이 향

 

 

잃어버리는 줄도 모르는 사이

얼굴이 뭉개졌다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온갖 것으로 덧칠된 그림자

 

그것은 얼굴이면서 그 이상이라 생각했다

 

없는 얼굴로 키스를 하고

없는 얼굴로 밥을 먹고

없는 얼굴로 지하철을 탔다

 

얼굴 없는 채로 모자를 쓰고 나를 찾아 돌아다녔다

 

얼굴 없다는 것이 얼굴이기를, 다시는

얼굴이 돌아오지 않기를

 

그 누구도 아니어서

아무것도 아니어서

 

없는 얼굴로 더 오래 울었다

 

이제 기다릴 수 있을까

 

네가 돌아온다 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옥타비오 파스 (태양의 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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