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큼지막한 호주머니 / 윤이산

주선화 2021. 3. 17. 08:11

큼지막한 호주머니

 

ㅡ 윤이산

 

 

큼지막한 호주머니 달린 옷이 있다

메모지도 넣고 돋보기도 넣고

자전거도 넣고 여행도 넣고 휘파람도 넣고

달걀 한 꾸러미 넣어 두면 저들끼리 알아서

다달이 월 수입 낼 것 같은 호주머니

 

칸칸마다 용도별로 수납하면

옷 한 벌로도 한 살림 차릴 것 같은

그런 호주머니 달고 걸으면

가진 것 없어도

걸음걸음 실실 콧노래 새겠다

 

구멍 난 줄 모르고 실속을 넣어 뒀다

덜렁 흘려 버려, 이 등신! 싶은 적 한두 번 아니지만

호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나설 때는

여윳돈 바닥난 것 같아, 숨을 데가 없는 것 같아

덜렁거리는 빈손이 안절부절못한다

 

언 손도 텅 빈 손도

언제나 군말 없이 받아주던

내겐 최측근이었던 호주머니

 

땅에 묻고 돌아 선다

 

이젠 더 넣을 것도 꺼낼 것도 없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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