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지막한 호주머니
ㅡ 윤이산
큼지막한 호주머니 달린 옷이 있다
메모지도 넣고 돋보기도 넣고
자전거도 넣고 여행도 넣고 휘파람도 넣고
달걀 한 꾸러미 넣어 두면 저들끼리 알아서
다달이 월 수입 낼 것 같은 호주머니
칸칸마다 용도별로 수납하면
옷 한 벌로도 한 살림 차릴 것 같은
그런 호주머니 달고 걸으면
가진 것 없어도
걸음걸음 실실 콧노래 새겠다
구멍 난 줄 모르고 실속을 넣어 뒀다
덜렁 흘려 버려, 이 등신! 싶은 적 한두 번 아니지만
호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나설 때는
여윳돈 바닥난 것 같아, 숨을 데가 없는 것 같아
덜렁거리는 빈손이 안절부절못한다
언 손도 텅 빈 손도
언제나 군말 없이 받아주던
내겐 최측근이었던 호주머니
땅에 묻고 돌아 선다
이젠 더 넣을 것도 꺼낼 것도 없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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