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 상자의 세계
ㅡ하린
방 한가운데에 상자를 놓고
상자 속에 또 상자를 넣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
취급주의가 써져 있으면 좋으련만
열 때 울지 마, 열고 나서 웃지 마, 라고 써져 있으니
도대체 애인은 무엇을 보낸 걸까
돌아온 것이
베개가 기억하던 한숨이라면
옆구리가 갑자기 갖게 된 광장이라면
머뭇거릴 필요 없었을 게다
차라리 죽은 이가 죽기 이틀 전에 보낸 상자라면
심호흡을 하고 죄책감을 품에 안으면 된다
그런데 상자 안의 상자라니
감정 안에 감정이라니
내가 당신에게 보낸 건
시나 일기 같은 가벼운 것들뿐인데
흔들고 귀를 대보면 기척이 난다
만약 돌멩이가 들어있다면
기꺼이 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내어줄 것이고
음산한 분위기를 먹고 자란 음지 식물이라면
식물이 화를 내도 다 받아줄 텐데
자학과 자책이 튀어나올까 봐 두렵다
아침까지 당신이 누웠던 침대에 그대로 둔다
상자와 함께 잔다
개봉을 또다시 하루 더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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