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모과의 방 / 손택수

주선화 2022. 3. 7. 10:47

모과의 방(외1편)

 

ㅡ손택수

 

 

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

제 방에 들어오니 향이 살아납니다

향이 없었던 게 아니라 방이 너무 컸던 거예요

애옥살이 제 방에 오니 모과가 방만큼 커졌어요

방을 모과로 바꾸었어요

여기 잠시만 앉았다 가세요 혹시 알아요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요

그때 잠시 모과가 되는 거죠

실갗 위에 묻은 끈적한 진액이

당신을 붙들지도 몰라요

이런, 저도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의 즙이랍니다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지 못해도

죽은 향이 살아나라 웅크린 방

 

 

 

흰둥이 생각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

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다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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