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시 (외 1편) / 박선희

주선화 2022. 8. 31. 09:46

시 (외 1편)

 

-박선희

 

 

"시는

네 발로 기던 나를 세운 목발이며

걸을 때마다 허공에 매달린 왜소한 왼쪽 다리며

텅 빈 교실의 파수꾼이며

빈시간을 눌려대던 건반의 울음이며

찔레꽃 아래서 숨결을 불어 넣던 연애며 

청천벽력, 온몸을 줄에 매달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며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 아래서 옛집을 더듬던 기억이며

잃어버린 신발을 품고 깨어나던 꿈이며

함석집 처마 밑에 찍힌 낙숫물의 리듬이며

푸르고 누런 계절의 흔적을 물어 나르던 현기증이며

자나 깨나 밀려와 물의 깊이를 재는 파도의 분노며

밤을 인질로 곧게 세우는 펜촉

마침표를 찍는,

다시 시작이다"

 

 

 

손금이 가렵다

 

 

손바닥을 북북 긁는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가려움

긁힌 금이 붉게 돋는다

붉은 개미들 줄지어가듯

길을 짚으며 가던 금들

일제히 손가락 사이로 빠진다

 

뒤집어 본 손등엔

밤낮 으르렁대던 푸른 핏대

붉으락푸르락 굽히지 않던 목소리

모래 위에 부은 물처럼 흔적 없고

긁어도 긁어도 시원찮은 거북 등이

웅크리고 있다

 

움켜쥐었던 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새끼 손가락 쪽으로 휘어진 결혼선도

중간중간 끊길 듯 이어진 생명선도

손날 아래로 희미해진 재물선도

붉은 자국 속에 숨어든다

 

그러쥐고 있던 한 줌의 공기 풀어놓자

가려움으로 깨어나던 오늘의 감정선

잔주름 사리로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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