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숨은 신 / 기혁

주선화 2023. 1. 19. 17:03

숨은 신

 

-기혁

 

 

침묵이 태어나기 전 지상은

살아있는 말들로 가득했다 한다

태초의 빛을 선포한 조물주의 턱 밑으로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기 위한 시간과

빛을 수식하기 위한 어둠이

무수한 말의 자손을 퍼트렸다 한다

저마다 좋아하는 동물과 식물

사물과 사상 따위를 붙잡고

최초의 소리로 울려 퍼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한다

아직 발명되지 않은 문물과

역사의 마디마디 오래 붙어있던 어둠의 후손들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한다

사람을 이롭게 하던 새로운 말들이

사람을 죽이는 더 새로운 말이 되어 돌아왔고

희망을 노래하던 말은 의미를 갈아입지도 못한 채

폐허의 경계선을 따라 몰려들었다 한다

전쟁의 복판에서야 평화가 입에 오르내리듯

몇몇 말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다

애타게 신을 부르던 말들이 마침내

인류에 대한 애도로 되돌아왔을 무렵

두꺼운 책 속에 납작 엎드린 말들은

울기 시작했다 한다

번역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에 두 줄을 긋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만 보인다는 신의 멱살을

배신자처럼 꼭 붙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