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꽃
-김기덕
생의 반쪽들이 갈고리에 걸려 물구나무를 섰다
0을 가리키는 기울기의 눈금엔
잘려진 시간이 핏물로 고여 있었다
칼을 맞고 일어서는 냉동의 살들,
해체의 의미 속엔 뼈도 눈물도 없었다
세월의 등살에 새겨진 물결무늬는 하루가 풍랑이고 폭풍이었다
푸른 도장을 받기 위해 문자와 글자들이
건초더미를 되씹던 언어의 사체에서 한 근의 채끝살을 바르기 위해
살아서 고뇌 중인데,
죽은 자의 칼이 산자의 살을 바른다
광란의 바람이 이는 ㄱㄴㄷㄹ
소가 환전된 금고를 열면 목 쉰 방울소리가 울렸지
벌판에서 울부짖던 메아리들만 뼈 속을 맴돌았다
난도질 할수록 부드러운 칼의 속삭임
현란한 혀의 놀림에 상처는 깊었다
무덤 속 벌레들의 섬뜩한 미소 같은 하늘을 품고
되새김질 해온 말씀들이 일어나 칼춤을 춘다
헝겊처럼 얇게 썰어지며 리듬을 탄다
해의 시즙이 묻어나는 언덕 위로 밤새 뚝, 뚝 떨어진 꽃무늬들
이글거리는 불꽃 속으로 눈송이들이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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