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타투
-정끝별
너무 멀리 가면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데
요즘 들어 자꾸, 방금 기억이 가장 멀리 가요
약과 약속을 잃고 이름과 번호와 비밀을 잃고 하던 일과 가던 길을 또 하얗게 잃어요
비바람에 가지와 잎까지 잃고 옆집 도랑에 박힌 뒤뜰의 모과 낙과는
내게서 멀리 간 내일의 미래라는데요
살던 집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자꾸, 내 일을 잃고 내일을 잃곤 해요
집 가는 길의 손목에 새겨야 할까요, 못난 모과를?
집에 모과 나무가 있어요
나는 늘 가까운 것에 갇히고 가까운 것에 막혀 고립무원이었는데요
모과나무 우듬지에 남겨진 사고무친 모과 한알은 모과나무에게서 멀리 간 모과나무의 구멍이었는데요
그 구멍이 시라며 구원이라며 구멍을 구걸할 때마다 나도 집에서 멀리 가곤 했는데요
모과 낙과처럼 내가 알던 사람은 멀리 갈수록 어두워졌고
모과 향기처럼 내가 알던 사람도 멀리 갈수록 엷어졌어요
그러니 아직 기억하는 연분홍 모과꽃은 내게서 가장 멀리갈 미래?
아, 신도 나를 잃을 수 있으니 손목 어디쯤 미래의 모과꽃과 모과를 새겨둬야겠어요
열두발 바람에 모과보다 더 멀리 간 모과잎처럼 언젠가 나도 내 기억의 난민이 될 테니
청사진처럼 내 집의 문패가 되어줄
너무 많은 모과를 잃은 모과나무 아래로 이끌어줄
마지막 모과를 손목에 새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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