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옛말 / 오탁번

주선화 2024. 2. 20. 10:05

옛말

 

-오탁번

 

 

잠결에도 꿈결에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내 옛말의 들머리는

백운면 평동리 바깥평장골 169번지

호적등본만 한 우리 집이다

남아있는 사진 하나 없지만

그냥 잿빛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내가 태어난 우리 집이다

1951년 정월 상주로 피란 갔다가

봄이 되어 돌아오니

흔적 없이 사라진 우리 집!

전쟁이 치열할 때

군용 비행장을 건설할 셈으로

동네를 다 불살라버렸는데

원주 근방까지 쳐들어왔던

적군이 후퇴하자

군인들이 다 팽개치고 북진했다

빨갛게 불타 죽은 

향나무 한 그루가

잿더미가 된 우리 집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봄 내내 움막에서 살았다

참꽃이 불알산을 물들이고

초저녁부터 부엉이가 울었다

가을 되도록

나물죽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품앗이로 외양간만 한 새집을 지었다

맑은 샘물이 솟는 앞산 아래

바깥평장골 우리 동네는

어깨 겯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도 눈 감으면

쇠버짐 부스스한 내 짱구도

침 발라가며 쓴 몽당연필도

도렷하게 잘 보인다

어머니의 밭은 기침에도

문풍지가 울고

한밤중 요강에 오줌을 누면

달걀빛 처마에 깃든

참새가 잠을 깬다

 

해와 달은 쉼 없이 뜨고 졌다

백마고지 전쟁터에 나간

큰형한테서 편지가 온 날이면

네 남매가 모여앉은 두레반에서

어머니가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날 밤 장독대 정화수에는

얼음꽃이 뽀족이 피었다

눈사람의 코가 툭 떨어져서

숯이 된 아침

나는 큰형한테 편지를 부치러

장터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눈발이 선 하늘을 막아서는

우체국 앞 커다란 향나무가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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