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
-오탁번
잠결에도 꿈결에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내 옛말의 들머리는
백운면 평동리 바깥평장골 169번지
호적등본만 한 우리 집이다
남아있는 사진 하나 없지만
그냥 잿빛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내가 태어난 우리 집이다
1951년 정월 상주로 피란 갔다가
봄이 되어 돌아오니
흔적 없이 사라진 우리 집!
전쟁이 치열할 때
군용 비행장을 건설할 셈으로
동네를 다 불살라버렸는데
원주 근방까지 쳐들어왔던
적군이 후퇴하자
군인들이 다 팽개치고 북진했다
빨갛게 불타 죽은
향나무 한 그루가
잿더미가 된 우리 집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봄 내내 움막에서 살았다
참꽃이 불알산을 물들이고
초저녁부터 부엉이가 울었다
가을 되도록
나물죽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품앗이로 외양간만 한 새집을 지었다
맑은 샘물이 솟는 앞산 아래
바깥평장골 우리 동네는
어깨 겯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도 눈 감으면
쇠버짐 부스스한 내 짱구도
침 발라가며 쓴 몽당연필도
도렷하게 잘 보인다
어머니의 밭은 기침에도
문풍지가 울고
한밤중 요강에 오줌을 누면
달걀빛 처마에 깃든
참새가 잠을 깬다
해와 달은 쉼 없이 뜨고 졌다
백마고지 전쟁터에 나간
큰형한테서 편지가 온 날이면
네 남매가 모여앉은 두레반에서
어머니가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날 밤 장독대 정화수에는
얼음꽃이 뽀족이 피었다
눈사람의 코가 툭 떨어져서
숯이 된 아침
나는 큰형한테 편지를 부치러
장터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눈발이 선 하늘을 막아서는
우체국 앞 커다란 향나무가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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