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여름 / 박남희

주선화 2024. 12. 11. 09:10

여름

 

- 박남희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었더니 빼꼼히 구름이 비집고 들어온다

구름은 들어오다가 열린 문 사이에 걸쳐 있다

(자세히 보니 그 모습은 머리를 민 낯선 아내다)

 

르네 마그리트는 그 광경을 보며

'여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광경은 오래 전부터 액자 속에 갇혀있다

 

누군가 칸트와 데리다에게

액자 속 그림을 보고 질문을 던졌더니

칸트는 액자 속 그림인 에르곤을 예술이라고 하고

데리다는 액자인 파레르곤까지가 예술이라고 불렀다

 

나에게 아내는 에르곤일까 파레르곤일까

젊은 시절의 아내는 아름다운 에르곤으로 보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파르레곤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 역시 아내에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내의 모습은 지금까지 수시로 미끄러지면서 다가와서

나에겐 여전히 차연(差延)*이다

 

아내의 모습에는 확정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아내는 어제 항암 후유증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밀고 왔지만

갑작스러운 낯선 모습에는

손에 목탁을 들려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오늘 내가 본 아내는 문틈 사이의 구름이다

반쯤 열린 문 사이에 끼어있는 저 아름다운 구름은

들어오려는 걸까 나가려는 걸까

 

나는 오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되어

갑작스레 머리 반들거리는 낯선 아내가

한층 모호해진 문틈 사이의 구름으로 보여

아내를 '여름'이라고 조심스레 불러본다

 

갑자기 여름의 습한 공기가 몰려온다

매지구름이 문 안으로 밀려들어와 비를

왈칵 쏟아낼 것 같다

 

 

* 차연(差延): 데리다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신조어로 '차이'와 '연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차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의미가 미끄러져 언어의 의미가 지연되고 연기된다는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