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세계의 숫자 공장 / 박주택

주선화 2025. 2. 13. 10:42

세계의 숫자 공장

 

- 박주택

 

 

어깨 좁은 바람이 공간을 읽으며 간다

오후의 입맛은 부서지고 깨진 물이 흩어질 때

열린 곳마다에서는 숫자들을 만들어 낸다

아득한 현기 속에 걸려 있는 전광판은 거리의 걸음들을

멈춘 차의 도열이 뻗은 도로의 선들을

숫자는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거꾸로 흐르지도 못하고 위로는 떠 있지도 못한 채

바닥만을 찾는 물은 다른 곳에서 새가 될 수 있는가

애욕의 노트에 적혀 있는 거리는 걸을 때마다 갈라지고 쪼개져

속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잎이 듬성듬성한 고양이는 가지를 뻗어

추억이 되려고 몸을 비트는 아파트를 서성인다

 

하늘이 내려와 떠 있는 지상을 받치고 있는 한낮

가보고 싶은 나라는 죽어서 나갈 수 있을 지

걸어도 걸어도 죽은 사람들만 걸어 다닌다

발이 빠진 채 무더기로 멈춰 있는 창문

그 물결을 핥는 고양이

거리를 다 돌아서 돌아오는 오르막길에

비틀리는 몸에서 빠져나오는 비명들

몇 층이랑 것도 없이 몇 호라고 할 것도 없이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명세서가 빠져 나와 가득 아파트를 채우고는

거리 전체를 채운다 수북하게 파도에 새기며

바다로 먼바다로 출렁거린다

 

이것을 무어라고 부르겠는지

바깥으로 뻗어 무한에 닿을 것처럼

살아서도 가고 죽어서도 가는 숫자들

이 진종일의 윤회는 실눈을 뜨고 한곳만을 바라보며 날름거리는 영수증들

잠을 설친 번호들이 쭈그려 앉은 밤

바늘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낚싯대

거기 있어도 알지 못한 채 스스로 사람이 아닌 채

아침에 갇혀 순간적으로 떠올라 처마 없는 밤에서 터지는 사람

 

금방 어디쯤 십자가 쉰 목청으로 남아

매연에 검게 변해가고 해돋이를 재촉하는 도심 속의 절들은

저 유서 깊은 체온으로 듣는다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이 높낮이가 있는 종은

검은 것처럼 말라 깨어나지 못한 짐승과 함께 장막에 휩싸인다

지금은 그냥 어둠 이것은 바다가 아니다

어둠은 검은 피처럼 죽은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내려오고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숫자의 선

곧 문이 열리고 희생양을 부르는 소리들이 아우성을 칠 때

부른 이름들 검은 피처럼 깨어나리라

검은 피처럼 깨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