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 임유영

주선화 2025. 5. 16. 18:04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

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

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

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

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

통유리창 밖에서 네가

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

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

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

(넌 가끔 안경을 껶지)

하얀색 마스크 속에

(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

너의 입술이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

쫓기는 마음으로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

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

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

대추차도 먹어보고

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

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

모두 새로 기입하는

이 흐린 저녁

그 가로등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