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판교 / 허연

주선화 2025. 5. 24. 07:34

판교

 

-허연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

뜻대로 된 것이다

 

먼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

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

시성(諡聖)되지 못한

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은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화와 연정, 불운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

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그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가 취해서 불렸던 노래들은 다 어디로 가서

부질없는 삶과 죽음의 지층으로 들어갔을까

 

그대가 죽고 내가 살아서 그 노래들을 부를까

 

아버지는 나보고

왜 젓가락처럼 자꾸 마르냐고

성질머리 좀 고치라고 했다

 

속으로는

다 당신에게 물려받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성자가 된 아버지께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초개인주의자 천지인 집안 내력상

아버지는 낡은 임대아파트에서 외롭게 죽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출소하는 날 아버지는 내게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어줬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물려 줄 전부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제 26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중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