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곡하게 내 몸에 들어와
-이서린
창을 등지고 노트북을 펼쳤다, 순간
화면 가득 들어찬 아직 이파리 하나 피우지 않은 늙고 거대한
나무의 위엄, 촘촘하고 뒤틀리고 빼곡한 나뭇가지가 점령한
노트북, 크고 검은 새가 화면에 들어왔다 사라지고 저물어가
는 하늘이 들어와 앉고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도 들어앉고
화면에 박힌 거대한 나무에 압도된 채 키보드를 두드리는커
녕 눈과 손은, 노트북에 뿌리내리고 화면 밖으로 뻗어 가는 나
무를 보기만 하는데
나무는 어둠 속에서 숨을 쉬고 자라고 촉수를 뻗어 나의 생
각을 더듬고 주변이 캄캄할 때까지 조용히 그리고 완곡하게
내 몸에 들어왔다
아랫도리가 더워지고 부풀어 오르다 뻐근해지는 손끝, 손가
락에서 돋아난 나뭇가지가 노트북을 휘감았다 휘고 꺾이고 뒤
틀린, 잎 하나 없는 가늘고 검은 가지가 다시 나를 타고 오르자
벌어지는 입안에서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늙은 나무의 호흡이, 내 몸의 검은 숲이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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