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87

사람은 모르고 새들만 아는 것들 / 차유오

사람은 모르고 새들만 아는 것들 - 차유오  아무도 없는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내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계속해서 멈추는 버스.텅 빈 가게를 서성이는 고양이와 더러워진 물. 힘없이 쓰러져가는 건물.사람들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오후.도로를 지나가는 장례차.누군가의 한 시절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힘차게 걸어가지만 누군가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람.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사람.잃어버린 물건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버스가 버스를 지나가고 사람이 사람을 지나가는 풍경.한곳에 모여 있던 새들이 전부 날아가는 순간.사람은 모르고 새들만 아는 것들

회색 코트 / 강기원

회색 코트 -강기원  이른 아침회색 코트 속에 몸을 구겨 넣는다날로 헐거워진다몸이 줄어드는 걸까할 일은 점점 늘어나는데 헐렁한 코트를 입고 지하철 속에몸뚱이를 간신히 밀어 넣는다날로 사람들이 많아진다인구가 줄어 큰일이라는데 사무실에 도착해바퀴 달린 검은 의자에 털썩의자는 날로 움푹 패인다체중은 줄어드는데 바퀴가 달렸으나 달리지 않는의자점점 웅덩이가 되어간다, 언젠가의자 속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가 뜰지도 모른다 후줄근한 회색 코트 한 벌이 퇴근 시간의 지하철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코트 속에 있어야 할 몸이 없다 아뿔사!코트는 몸뚱이를 잊고, 잃고혼자서 실려간다 통조림 속 정어리처럼 꽉꽉 들어찬사람들 사이에서발도 없이 붕 뜬 채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 하기정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외 4편) - 하기정  그늘을 깊게 파는 사람을 알고 있다거푸집에 누워 왼손바닥을 찍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기다려왔다는 듯이그는 도끼로 계단을 내고 나무에 오르는 일을 경멸했다기름을 바르고 처참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일에 열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늘 미안해서안녕이 없는 사람그리하여 그는 돈을 받지 않고도아름답고 처절하게 잘도 팔았다무엇을? 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슬픔을 덤으로 얹어주었다그는 매일 밤 요령부득으로 짠 스웨터를 입고터진 옆구리를 꿰맸다 요령이 방울 소리를 내며실패꾸러미를 안고 왔다꽃병을 응시하다 정물의 배경이 되는 조연들은필사적으로 필사하는 일이 파국으로 치닫도록코너로 몰고 가는 중이었다 여전히 지하에서 촉수를 기르는 사람아직도 제 눈을 찌르고 있는 사람 화살이 ..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 한혜영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 한혜영 마디마디이어 붙여야 하나의 이름을 갖는 것들이 있지시간과 시간,사건과 사건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들이 다 그렇지만, 철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고통스럽게 끌고 다니던 척추를 부리고 있네세월의 검은 뼈를 세느라밤새도록 철커덕거리는 열차, 나는 지금 내 등에 깔린무수한 침목(枕木)을 세며 가문을 달리는 중이라네 검은 입술을 가진 터널 입구에아버지의 얼굴이 실패한 혁명군처럼 내걸리고화통소리 한결 높이는 열차는코끼리처럼 달려 아버지의 얼굴을 가차 없이 찢어버리네 하긴, 한낱 사소한인생 때문에 역사가 멈출 수 없는 법이지시간이란 때때로 물이고 불이고 바람이고 광기니까마디마디의 낱말,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진 한 권의 책을 일으켜 세우는아, 버거워 삐걱거리는 나의 척추여 누..

돼지와 비 / 김륭

돼지와 비 - 김륭  우는 사람을 잘 먹이고 잘 입히는 마음을 쓰려다가죽었다고 말하면 거기, 당신은 웃겠지요. 따라 웃는 사람도 많겠지요. 참 다행한 일이에요.여기가 아니라 거기여서 당신이 웃으면 쥐도 웃을 것 같아나는 조마조마 또 비에게 가요. 비는 기다리는 일이 아니어서 올 때 울었으니 갈 때도 울어야지 싶은그런 마음일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가만히 돌멩이처럼 울어주는 일, 그것은단 하루동안만이라도 우려먹고 싶은 일이어서 나는 가끔씩 돼지를 돌보는 바람 같다.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마다 잡히지 않는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 내가 불길해질 때가 있어서 들켜서는 안 되는 잠, 요즘 들어 자주 비가 새지만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물끄러미구경만 한다. 돼지도 돼지만큼 비를 올려다볼 수 있고 우산..

오늘밤은 리스본 / 김영찬

오늘밤은 리스본 - 김영찬  하지만 오늘밤엔 리스본까지만 바르셀로나, 쌩 폴 드방스쯤이야 나중에 품어도 전혀늦지 않지 북방의 주택가엔 주인 없는 개들만 어슬렁어슬렁빠리의 쌩 제르맹 뒷골목에 나뒹구는 빈 포도주병들만습관적인 휘파람 소리를 내더라도오늘은 오직 리스본까지만, 몰도바몰디브몰라도 그만 안 가도 그만그렇더라도 결국품 안에 끌어들여 일일이 쓰다듬게 될 무 국적의 섬들을 언제까지방치할 수야 없지 초저녁부터 야심한 밤까지 리스본의 불꺼진 테라스에 기대어고즈넉한 밤안개에 뜬금없는칵테일 여행진한 압생트 쑥 향에 코를 처박고뜨거운 섬이 하나하나 가슴 복판에 솟구칠 때까지집에 갈 생각배낭 메고 딴 길로 샐 생각일랑아예접어둘 것 그렇고말고 오늘처럼 과달키비르강(江)이 소리 없이강물 수위를 높이며 시종일관침묵을 고..

이별 메뉴 (외 1편) / 도복희

이별 메뉴 (외 1편) - 도복희  쇼팽 환상곡으로 부탁해요선율에 기대어 탈출을 시도해 보려고요노르웨이 자작나무 숲의 통나무집새벽이 무지갯빛으로 물드는 곳에서누구도 마주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움푹 파인 초승달에 걸터앉아낮달이 될 때까지밤의 벼랑을뜬눈으로 보아야 할 테지만상관없어요당신이라는 감옥에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발자국 사라진 사막을 걷는 일이 대수겠어요한때 인연이라 믿었던 사람이숨통을 조이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기대는 죄가 되죠모든 당신은 환영이었습니다맨발로 도밍자 되어 자작나무 숲길을 달려가요쇼팽 곡으로 부탁해요   부드러운 은둔  새들이 날아갈 방향을 바라보는 저녁은늘 그대의 집 쪽이었다, 습관 같은 것 두꺼운 책을 찢어 내며 햇빛을 차단한 시간 동안활자들이 말을 걸었다 알아들을 수 없어서 ..

한파주의보 / 박기원

한파주의보 - 박기원  갈 곳 정해진 하루는오라는 곳 없는 오늘과 기억이 같을까 국밥집에서 허겁지겁 베어 먹은 뜨거운 김이줄이 엉킨 정류장에서 입김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수은주가 웅크릴수록 남해로 가는 버스는건조한 허공끼리 부딪치는 어깨처럼 투덜댔다코를 풀지 않는 맹맹한 공기와흐리멍덩한 풍경이 마주치는 동안누가 없앤 마음인지 모르는 가슴이김 서린 차창에 하트를 찍던 손과의 악수를 꺼렸다 살얼음 같던 사람의 체감온도를 기록해 둔 수첩을 꺼내하루치 감정의 절댓값과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뀌는 마음의 기울기를체온계 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어본다늘 그랬듯 새롭지 않은 방식으로 돌아올 것이었지만늘 그랬듯 이번에도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적어두었다 내가 나라면,돌아오지 않을 듯 돌아오는 내가 더 미울까돌아올 듯 돌..

눈사람의 시간 / 한정원

눈사람의 시간 - 한정원    떨고 있는 눈사람에게 녹지 마, 라고 말하는 대신울지 마, 하고 증발하는 어깨를 털어주었지.   너는 눈이 있으니까, 물을 품고 있으니까, 뺨이있으니까, 스며들 입이 있으니까, 울고 나면하늘이 씻은 듯 없어질 것 같아 다시 녹지 말라고얼음 밴드를 붙여주었지.   언제나 흘러내리는 무릎, 탈주할 기둥 뒤에서시간을 재고 있는 모래시계 속 눈가루 날리는.   소멸한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알았을까, 흐르는 아스팔트, 도착할 호수와 바다가있다는 것을, 우주의 작은 숲 속으로 길을 내고있다는 습관을.   세상에 나쁜 날씨는 많았지, 이탈한 햇빛과바람이 성을 쌓는 동안 눈의 살점을 떼어내 오리를만들고 기러기를 새기고 아기를 낳고 미래는눈보라 속에서 희미하게 쌓여갔지. 나는 눈..

눈치 없이 핀 꽃 / 정선희

눈치 없이 핀 꽃 - 정선희  엄마는 금기어였다 금기어를 키우지 못해서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녀의 손이 목련 비늘처럼 떨어졌다 새는 남쪽 나라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목에 걸린 가시를 밥과 함께 꿀꺽거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울지 않는 아이의 눈꼬리는 길다한글보다 눈치를 더 빨리 깨친다 엄마 없는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잘 숨기고 틀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 오랫동안 무언가 목에 걸려물을 마시고 기침을 해도 내려가지 않는다말을 할 때마다 캑캑거렸다 의사가 매핵기라고 해서잔기침을 쏟았다삼켜지지 않는 말들을 울대에 붙은 채 살고 있나요? 매화꽃 피면 탐스런 매실과 함께엄마라는 시큼한 금기어도 주렁주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