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91

그리운 중력(重力) / 강영은

그리운 중력(重力) -강영은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 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지만,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하는데 마..

쪽(외 1편) / 김명희

쪽(외 1편) - 김명희    어차피 쪽 난 인생 마지막 남은 쪽 골짝 황무지에 묻었다콘크리트 바닥보다 낫겠지 그래도 흙이니까 초승달 품어도 달덩이 구근이 되지 않았다 너그러운 건 하늘이지 땅의 일은 어긋나기 일쑤 독설과 풍작 사이 길을 내었다 불안을 껴입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낮과 밤 새파란 이랑을 덮었다 일찍 다섯 쪽모두 잃고 언 땅에 뿌리박은 그녀, 몇 해만의 풍작인가 아직덜 마른 구근 축축하게 흙을 물고 있다 뱉어야 할 것을 뱉지못한 쪽과 쪽 사이 바람길 튼다 엄지로 내리찍으며 아귀에 힘을 준다 칼보다 손이 유용한 수렵의 유전 온몸에 모아 캄캄한응집의 세계 풀어헤친다 한겨울 빙판처럼 단단한 구근 모진독기가 쩍 갈라진다 두텁게 앙다문 입술 사이 틈이 생기고 퍼즐 조각을 맞춘다 뾰족한 그녀 서사도 본..

신년 운세 / 고선경

신년 운세 - 고선경  나는 남을 돕는 팔자라고 그랬다그렇게 말한 사주쟁이가 한둘이 아니다 잘 봐내가 얼마나 쉽게 슬퍼하는 사람인지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 나를 슬프게 만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슬플수록 사나운 표정을 짓게 되는 내가 있고사나운 표정을 해명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행운의 색깔은 하늘색오늘 내가 가진 물건 중 하늘색은 하나도 없네 누군가는 모든 게 나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그랬다도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도 꼭 이루어질 테니 기쁨이라고 제일 친한 친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마흔 살 되면 다 해결될 건데 뭐가 문제?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이지 팔자가 싫을 때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라고 적었다월급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대 가스가 끊겼을 대 이십육인치 캐..

땅땅거리다 / 유순예

땅땅거리다 - 유순예  으스러지도록 농사일만 하다 죽은아버지 어머니가 두고 간땅! 땅! 땅!그 땅을 놀릴 수가 없기에 이 딸내미가 부쳐요아버지 어머니 누워 있는산소 밭에는 들깨를 심었고요저온창고가 있는 밭 한쪽너덜너덜한 비닐하우스 안두 고랑은 쪽파를 심었고요한 고랑은 양파를 심었고요가상마다 진을 쳤던잡초들은 확 뽑아버리고 월동 씨앗을 뿌렸고요배추 상추 고수 고추 갓 시금치 ···남새밭에서는 온갖 야채들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고요나는 옴마처럼 안 살 것여!앙탈 부리던 못된 것들이 곳곳에 처박혀서눈물을 베고 잠이 들던 이 딸내미는아버지 어머니를 꼭 닮은 농부가 되어가네요땅! 땅! 땅!이제야 저도 땅땅거리며 살게 되었네요

지옥에 간 사람들은 꽃을 심어야 한다 / 김복희

지옥에 간 사람들은 꽃을 심어야 한다 - 김복희  지옥에 가면 꽃을 심어야 해 모래사장이나 늪에서?아니그럼 움직이는 꽃은?아니 꽃 아름다운지가시가 있는지넝쿨째로 자라는지시들어가는지 말라 죽었는지사방 모르고밤낮 모르고심어야 해눕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아 한 송이를 받아 와제대로 서도록두 송이로 받아 와제대로 서도록 온갖 향기가 나는데향기인 줄 모르고한 사람 평생에 넘치는색채 속에서 꽃을 달라고말을 걸어도지옥에서 나가도 좋다고말을 해줘도무슨 말인 줄 다 알고도다 듣고도 자신의 손안에 꽃을악마에게든 천사에게든한 송이를 받아서한 송이를두 송이로 받아서두 송이가 뼈가 마르도록 고요한 풍경이야닿아도 닿아도 너른

표적 / 안희연

표적 - 안희연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녹기 위해 태어났다니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 마리 흰쥐의 가여움흰쥐, 열 마리 흰쥐의 징그러움흰쥐, 수백 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흰쥐가 산처럼 쌍여 있는 방에서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어름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거라고 무엇이 만든 흰쥐인 줄도 모르고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게 넌 죽기 위해 태어났어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이 날아온다당..

세계의 숫자 공장 / 박주택

세계의 숫자 공장 - 박주택  어깨 좁은 바람이 공간을 읽으며 간다오후의 입맛은 부서지고 깨진 물이 흩어질 때열린 곳마다에서는 숫자들을 만들어 낸다아득한 현기 속에 걸려 있는 전광판은 거리의 걸음들을멈춘 차의 도열이 뻗은 도로의 선들을숫자는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거꾸로 흐르지도 못하고 위로는 떠 있지도 못한 채바닥만을 찾는 물은 다른 곳에서 새가 될 수 있는가애욕의 노트에 적혀 있는 거리는 걸을 때마다 갈라지고 쪼개져속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잎이 듬성듬성한 고양이는 가지를 뻗어추억이 되려고 몸을 비트는 아파트를 서성인다 하늘이 내려와 떠 있는 지상을 받치고 있는 한낮가보고 싶은 나라는 죽어서 나갈 수 있을 지걸어도 걸어도 죽은 사람들만 걸어 다닌다발이 빠진 채 무더기로 멈춰 있는 창문그 물결을 핥..

도슨트 / 조온윤

도슨트 -조온윤  어떤 때는 한 사람 같고어떤 때는 두 사람 같다 교차된 두 팔이한 사람이 팔짱 낀 모습처럼 보이다가두 사람이 껴안은 것처럼도 보인다 갈라진 얼굴이한 사람의 정면 같기도두 사람의 옆면 같기도 하다 꼭 감은 두 눈은혼자만의 것으로도 보이고때로는 왼쪽과 오른쪽이 하나씩사이좋게 나눠 가진 것으로 보인다 손에 쥔 구슬은하나인 듯 둘 같은 몸피의 유일한 눈알어느 쪽이 눈을 뜰까어느 쪽과 마주 칠까 그것을 볼 때면부족한 이목구비를 붙여주고 싶은 가여움과차라리 갈기갈기 오려내고 싶은 두려움의 양가감정이 든다 그림 앞에서 오묘한 표정을 짓는관람객에게 문제를 낸다 이 그림은온전한 한 사람일까요눈알 하나를 돌려쓰는 두 괴물일까요

옷을 홀랑 태운 사과나무 / 이주언

옷을 홀랑 태운 사과나무 - 이주언    어제 먹다 남긴 사과가 접시 위에서 익어간다  어제의 잇자국 완강할수록 사과의 뼈는 더욱 향기롭다어제의 어제가 사과처럼 먹어치운 엄마도 익을수록 향기로왔다 내 속의 들판에서 홀로 익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곳의 사과처럼 산다 나는 별자리의 배열로 설계되었을 사과의 운명을 제멋대로 맛본다   정갈한 숫양처럼 잘 자란 사과 몇 알이 재단에 오른다   우주망원경으로 보았던 달의 맨얼굴과, 가끔 떠오르는 엄마의 표정과, 야생의 변제물들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는 것같다 청신할 때마다 양의 피를 땅에 뿌리던 계절처럼 되살아난다 반려를 빼앗긴 자들의 푯말 주위에는 기도가 흥건하다 수많은 외짝의 얼굴들이 정물처럼 나무에 달려 있다   들판에는 사과에게 옷을 입혀주는 나무가 있..

같이 앉아도 될까요 / 김재근

같이 앉아도 될까요 - 김재근  너는 아프다아픈 너를 보며같이 우울해야 할까혼자 즐겨워도 될까 처음 걷는 사막처럼처음 듣는 빗소리처럼어디서부터 불행인지 몰라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몰랐다 너를 위한 식탁창문은 비를 그렸고빗소리가 징검다리를 건널 때까지접시에 담길 때까지그늘이 맑아질 때까지고요가 주인인 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너를 위한 식탁촛불은 타오르고촛불 위를 서성대는 그림자너를 밝히는 시간너를 기다리는 시간시간을 함께 나누려면 얼마나 더 멀어져야 할까 너를 처음 읽는 것 같아헤아릴수록 빗소리 늘어나는데 너는 오늘의 불안인가식탁은 불멸인가수프는 저을수록 흐려지고빗소리에 눈동자가 잠길 때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너를 위한 식탁너를 본 적 없어너라고 부를 수 없다우리를 증명하는 우리의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