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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적으로 / 김미령

전면적으로 -김미령 어느 날 공사용 가림막이 전면에 펼쳐졌습니다말수가 줄었습니다당신의 아침 정원으로 기분 좋게 걸어 들어가는 내 모습을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꽃병을 마주 보고 끝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근력을 키우기에 좋습니다과일 접시의 오와 열그 샛길은산책하기에 좋습니다 어느 날 포장지를 뜯어낸 새로운 애인이 우뚝 서 있고 새로운 기분에 적응하기까지미간이 무럭무럭 넓어집니다넓어진 이마로 지나치기 좋은 거리입니다 다른 종류의 웃음은 가끔 무섭습니다 가림막 한쪽 끝에는 구름다리가 걸려 있고파스텔 톤의 저쪽 사람들이손짓합니다자고 나면 새로운 비밀이공터의 야채들처럼 쑥쑥 자라나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엔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우리가 안고 쓰러졌던 그 자리 주위로쇼핑백을 들고 수없이 지나쳤습니다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 김이듬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김이듬  해 질 녘 남쪽 해변에 닿았다길은 헤맸지만 도착했다 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 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여기 많다고동이 맞는 말이야? 밀려나가면 밀물이야? 썰물이야? 바지 걷어 올리며 큰소리로내게 묻는 건지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헷갈리잖아 어두워 가는 갯벌 위엔 경이럽게도 금이 많다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흔적인지자취인지성과나 업적으로 파생되기도 하지 뻘 위에 못으로 그린 추상화 같은이것은생존 발각될 단서순식간에 체취될 노선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퇴적물 위에 너는 해수 같은 혼합물과 갯벌 같은 잔여물을 사랑하고..

사슴뿔을 줍다(외 1편) / 이창하

사슴뿔을 줍다(외 1편) -이창하  늙은 아버지의 지게가 생각나는 오후지푸라기로 이어진 낡은 인연이 색이 바래지도록 땀을 흘리고 있다오랫동안 이어진 나그넷길에서 너를 만난 것은등이 굽고 백색인 아버지의 머리카락 같은 넝쿨 사이에서멈춘 시간 속을 배회하다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나 흘려야 눈물이 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까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시냇물 위에는 여전히 흰 구름이 흘러가고나는 오래된 외짝의 설화 같은 너를 주워 든다 너는 아버지의 굽은 지게 형상으로 오래된 기억을 지키고 있었으니모든 시작과 끝은 이렇듯 우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아는지단순하게 맺어진 인연으로아버지의 눈물 같은 형체가 그리워지는세상의 근원을 더듬게 하는 오래된 기억을 주워 들게 한다   그리움의 뿌리  새가 그림자를 훌쩍 떨어뜨..

코끼리 코는 CO-CO / 이만영

코끼리 코는 CO-CO -이만영  나는코끼리 구름 공장 알바생 히바스커스의 꽃말*을 좋아하지 내 주 업무는떠도는 구름을 생포하는 일 하늘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 코끼리들에게 줄 수 있는최고의 선물은 뭘까?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이거나외곽이 또렷한 슬픔이거나 커다란 손바닥과 귀를 가진 그물은불행한 구름을 오려두거나 포획하는데 아주 유용하지 생포한 핑크를 너에게안겨주고 싶어 가끔코끼리 구름의 허벅지에 상처가 나면분홍빛 피가 흐르지 구름이버리고 간 석양 무렵의아기 코끼리들을 뭐라 부를까? 새털구름, 털쌘구름, 높쌘구름,양떼구름, 달무리구름 .... 뿌리 뽑혀바람에 쿡쿡 찔리는 CO-CO의분홍빛 엉덩이 좀 봐  *섬세한 아름다움. 남몰래 간직한 사랑.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1그런 날이면 언제나이상하기도 하지, 나는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공..

예지몽(외 1편) / 정수아

예지몽(외 1편) -정수아  그 숲에는 신기루가 삽니다우리는 야릇한 것을 숨기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도 신기루가 될 수 있습니까 종려나무는 구름을 부릅니다잎도 꽃도 젖습니다꽃잎을 따다가 몸을 헹굽니다 우리도 잎이 될 수 있습니까 음지식물이 바람에 걸려 음표가 피어납니다숲은 불협화음으로 연주가 시작됩니다비단뱀이 스산하게 기어오릅니다우리는 까치발로 걷습니다 물방울이 늘어져 아칸서스잎에 달라붙어중얼거립니다 신기루는 힘이 셉니다 숨은 잎들 앞에서 얇아졌습니다초록은 언제나 초록입니까 새들은 종려나무 위에 앉습니다구멍 뚫인 잎에 가느다란 빛이 들어옵니다 손을 뻗어 그 빛을 잡습니다물고기가 손안에서 펄떡입니다비가 되어 쏟아집니다 까딱하면 건조해지기 쉬운 날들이 많습니다가끔 당신을 부르면 폭우가 쏟아집니다 숲은 저녁..

내 가난한 말들(외 1편) / 이은송

내 가난한 말들(외 1편) -이은송  왜 아픈 것들만 내 몸 같은지 모르겠어요이건 분명 내 연민의 오래된 유전자 때문이에요 이버지는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만 집으로 데려왔어요낡은 주머니에서는 늘구부러진 연장이며 구부러진 말들이 잠들어 있었어요집 안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구석구석 쌓이고삼각형의 기호들은 누룩처럼 삭아갔어요돌아온 아버지가 헌 주머니에서이끼와 녹이 슬어 부서지는 기호 같은 말들을 꺼내 놓을 때그건 오로지, 나만이 알아듣게 될 말들이라는 것을무심하게도 그때는 몰랐어요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찬 그 말들이낙엽처럼 내 가슴에 쌓이고 쌓일 때나는 가랑잎처럼 야위어 갔어요 가난한 것들과서러운 것들과 휘청거리는 것들만 눈에 밟히고내 어깨에 닿아 어지러운 것은아버지의 탓으로 돌렸지만잠시 잠깐 ..

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 / 고선경

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 -고선경  잘됐지 뭐야부러웠거든 너의 여름 원피스흰색 바탕에 연두색 클로버 무늬 자주 가는 천변 카페에서는사과잼 바른 와플을 팔기 시작했어 산울림보다는 유재하나김광석이 떠오르는 계절 절반만 빛바랜 이파리물웅덩이에 둥둥컨버스는 역시 로우보다 하이 밟으면이파리가 구겨지고 구름이 조각난다 카페 차양이 걷힐 때쯤너는 어느새 한참을 앞서 걷고 있어 석양을 배경으로 한 장면은오프링에 어울릴까 엔딩에 어울릴까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에서는남자애들이 농구를 한다골대의 그물망이 곧 찢어질 것 같다 텅 빈 쭈쭈바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손과너의 캄캄한 뒤통수 농구공이 쉴 새 없이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끼어드는"다 울었어?" 너와 내가 점점 나란해진다

홍화 / 고성만

홍화 -고성만  넘실넘실 황홀하게 타오르는 불꽃,붉은 물감 엎질러놓은 듯 나 어릴 적 보리 베는데 도망가지 못하는 카투리와알을 팔아 운동화 사려던 어머니 장에 가셨다가결국 못 팔고 눈물 뚝뚝 떨어트리며 돌아오셨다는이야기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는, 바다가 파란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것은 머리가 어지럽게 때문이다 낡은 필통 속 몽당연필들 동전 몇 개 짤랑이면서집으로 돌아오는 길 산밭에서 날린 불티 온 마을을 활활 태우는데 잇꽃 필 무렵 피가 부족해 용지붕 위로 끊임없이 구름이 흘러간다 헬기착륙장 너머 새 세상이 열린다는데 먼바다로통통통통 떠가는 배 구름은 먹장구름은 장맛비를부른다

메밀꽃밭 / 박성우

메밀꽃밭 -박성우  씨앗을 넣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메밀 줄기가 오밀조밀, 꽃을 피운다 한낮 볕에 이파리를 늘어트리면서도가늘고 여린 손을 뻗어 꽃을 내민다 해가 어지간히 넘어간 늦은 오후,호스를 밭머리로 길게 당겨소나무 산자락 메밀밭에 물을 준다 여느 때처럼 별생각 없이 물을 틀고밭이랑 가운데로 물을 뿌리는 찰나, 배추흰나비 떼가 일제히 솟구쳐 오른다실로폰 소리처럼 경쾌하게 튕겨 올라메밀꽃밭을 배추흰나비 밭으로 바꾼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일순간에내 안쪽으로도 하얗게 치고 들어와나조차도 메밀꽃밭 위로 띄워 올린다 하얗게 일렁이는 마음은 멈추지 않고물 호스를 그냥 거두어야 할지주던 물을 마저 주어야 할지,궁리하던 사이에도 배추흰나비 떼는 팔랑팔랑 붕붕, 나를 잡고 솟구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