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904

내 가난한 말들(외 1편) / 이은송

내 가난한 말들(외 1편) -이은송  왜 아픈 것들만 내 몸 같은지 모르겠어요이건 분명 내 연민의 오래된 유전자 때문이에요 이버지는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만 집으로 데려왔어요낡은 주머니에서는 늘구부러진 연장이며 구부러진 말들이 잠들어 있었어요집 안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구석구석 쌓이고삼각형의 기호들은 누룩처럼 삭아갔어요돌아온 아버지가 헌 주머니에서이끼와 녹이 슬어 부서지는 기호 같은 말들을 꺼내 놓을 때그건 오로지, 나만이 알아듣게 될 말들이라는 것을무심하게도 그때는 몰랐어요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찬 그 말들이낙엽처럼 내 가슴에 쌓이고 쌓일 때나는 가랑잎처럼 야위어 갔어요 가난한 것들과서러운 것들과 휘청거리는 것들만 눈에 밟히고내 어깨에 닿아 어지러운 것은아버지의 탓으로 돌렸지만잠시 잠깐 ..

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 / 고선경

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 -고선경  잘됐지 뭐야부러웠거든 너의 여름 원피스흰색 바탕에 연두색 클로버 무늬 자주 가는 천변 카페에서는사과잼 바른 와플을 팔기 시작했어 산울림보다는 유재하나김광석이 떠오르는 계절 절반만 빛바랜 이파리물웅덩이에 둥둥컨버스는 역시 로우보다 하이 밟으면이파리가 구겨지고 구름이 조각난다 카페 차양이 걷힐 때쯤너는 어느새 한참을 앞서 걷고 있어 석양을 배경으로 한 장면은오프링에 어울릴까 엔딩에 어울릴까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에서는남자애들이 농구를 한다골대의 그물망이 곧 찢어질 것 같다 텅 빈 쭈쭈바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손과너의 캄캄한 뒤통수 농구공이 쉴 새 없이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끼어드는"다 울었어?" 너와 내가 점점 나란해진다

홍화 / 고성만

홍화 -고성만  넘실넘실 황홀하게 타오르는 불꽃,붉은 물감 엎질러놓은 듯 나 어릴 적 보리 베는데 도망가지 못하는 카투리와알을 팔아 운동화 사려던 어머니 장에 가셨다가결국 못 팔고 눈물 뚝뚝 떨어트리며 돌아오셨다는이야기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는, 바다가 파란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것은 머리가 어지럽게 때문이다 낡은 필통 속 몽당연필들 동전 몇 개 짤랑이면서집으로 돌아오는 길 산밭에서 날린 불티 온 마을을 활활 태우는데 잇꽃 필 무렵 피가 부족해 용지붕 위로 끊임없이 구름이 흘러간다 헬기착륙장 너머 새 세상이 열린다는데 먼바다로통통통통 떠가는 배 구름은 먹장구름은 장맛비를부른다

메밀꽃밭 / 박성우

메밀꽃밭 -박성우  씨앗을 넣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메밀 줄기가 오밀조밀, 꽃을 피운다 한낮 볕에 이파리를 늘어트리면서도가늘고 여린 손을 뻗어 꽃을 내민다 해가 어지간히 넘어간 늦은 오후,호스를 밭머리로 길게 당겨소나무 산자락 메밀밭에 물을 준다 여느 때처럼 별생각 없이 물을 틀고밭이랑 가운데로 물을 뿌리는 찰나, 배추흰나비 떼가 일제히 솟구쳐 오른다실로폰 소리처럼 경쾌하게 튕겨 올라메밀꽃밭을 배추흰나비 밭으로 바꾼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일순간에내 안쪽으로도 하얗게 치고 들어와나조차도 메밀꽃밭 위로 띄워 올린다 하얗게 일렁이는 마음은 멈추지 않고물 호스를 그냥 거두어야 할지주던 물을 마저 주어야 할지,궁리하던 사이에도 배추흰나비 떼는 팔랑팔랑 붕붕, 나를 잡고 솟구쳐 오른다

목련꽃 허파 / 이은송

목련꽃 허파 -이은송  자정 무렵이면나는늘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으슥한 동네 골목을 서성이다가목련나무 그림자를 훔쳐보곤 했어요 벌써 몇 년째 꽃이 만개했던 집 앞 목련은 제 꽃들을 어디론가 떠나보낸 후제 발꿈치를 들고 허리춤에는 손을 넣고 슬금슬금 가로등 아래를 서성이는데이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그런 어느 날이었어요어둠 속을 서성이던 목련나무가 길모퉁이에서 달을 올려보더니슬그머니 옆길의 고물상 간판 앞에 서는 것,녹슨 빗장을 소리도 없이 열고는 고물상을 비추는달무리를 따라가달의 허리를 끌어안고 스며드는 것이었어요 나는 숨소리도 없는 고요한 고물상 모퉁이널브러진 녹슨 철제물들의 허파 위로만월이면 목련꽃들과 달빛과 바람들이 몰려와부드럽게 만개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떠나고 아프고 부서진 것들이 이곳..

밤바치* / 길상호

밤바치* -길상호  겹겹 안개에게 기도하는 동네가 있다네 돌을 넘겨 가재를 읽고 바닥을 읽고물을 다 읽고 나면 여길 떠나야지 고립을 기르다가 고립이 제 덩치보다 커지면 훌쩍 산길이 혼자 뜀박질도 하는 동네가 있다네 목이 쉬어 저녁은 오고밤하늘 갈아 씨 뿌리는 하나님이 있다네 다래 순으로 음악을 짓던 곳기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여 회의를 하는 곳 안건은 풀이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문 닫은 분교 운동장만 철봉을 하네 비가 이장을 맡은 동네 있다네이곳저곳 비느라 사람들 등은 굽고 하나님도 주름을 보이며 눈부시게 웃는주소도 아득한 동네 한번 들어간 시내버스는 보이질 않네  *강원도 홍천군 내면 살둔마을에 위치함

그리운 중력(重力) / 강영은

그리운 중력(重力) -강영은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 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지만,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하는데 마..

우수 무렵 (외 1편) / 성명진

우수 무렵 (외 1편) - 성명진  집 앞에 아이가 나와 서 있고노인이 앉아 있다한순간 아이와 노인이 가만히고개를 들었다 사내 하나가 고개를 떨군 채앞으로 다가선 것한 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그는 노인에게 큰절을 올린다 허물어져내내 들썩이는 몸 추운 행색이었으나다행히 지는 죄는 없어서인지지나는 햇빛에 비치는 몸이몰래 환했다   작약  우리 집에는꽃에서 나온 여자가 살고 있다 서러운 남자를 만나새끼들을 낳아 밥해 먹이고옷을 수선하면서 늙어 있다 이따금 목을 기울여 발갛게 울고이따금 목을 살랑여 발갛게 웃는다 손 동그랗게 모으고 서거나물 빠짐이 안 좋은 날 짓는 쓴 표정은꽃 속에 살 때 익힌 일 이제쯤 꽃으로 돌아가 예뻐져야 하는데새끼들 약 지으러 문밖 나간 사이그만 져 버리는 꽃 영영 꽃 속으로 못 돌..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 이승희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작약이 없다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거기와 이곳의 차이는 없고환상이라고 말하면 이미 환상은 아닌데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은거짓말이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새 한 마리가 바라본다나도 그곳을 바라본다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은 거기 있다허공에 뿌리를 두고꽃을 물속에 두었다누가 밀어넣었을까누가 밀어올렸을까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내 얼굴을 스쳐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작약이 없다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이제믿지 않는다치욕스럽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쪽(외 1편) / 김명희

쪽(외 1편) - 김명희    어차피 쪽 난 인생 마지막 남은 쪽 골짝 황무지에 묻었다콘크리트 바닥보다 낫겠지 그래도 흙이니까 초승달 품어도 달덩이 구근이 되지 않았다 너그러운 건 하늘이지 땅의 일은 어긋나기 일쑤 독설과 풍작 사이 길을 내었다 불안을 껴입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낮과 밤 새파란 이랑을 덮었다 일찍 다섯 쪽모두 잃고 언 땅에 뿌리박은 그녀, 몇 해만의 풍작인가 아직덜 마른 구근 축축하게 흙을 물고 있다 뱉어야 할 것을 뱉지못한 쪽과 쪽 사이 바람길 튼다 엄지로 내리찍으며 아귀에 힘을 준다 칼보다 손이 유용한 수렵의 유전 온몸에 모아 캄캄한응집의 세계 풀어헤친다 한겨울 빙판처럼 단단한 구근 모진독기가 쩍 갈라진다 두텁게 앙다문 입술 사이 틈이 생기고 퍼즐 조각을 맞춘다 뾰족한 그녀 서사도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