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위선환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첫
째 풍경 속에서는
몸속에 두 귀를 묻어버린 물고기의 몸속보다 깊은 적막을, 적막하므로
무한한 그 깊이를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눈 뜨고 처음 내다본 앞 바다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는 둘째 풍경 속에
서는
야윈 손이 반음씩 낮은 음을 짚어가는 저녁 무렵에 어둑하게 어스름이
깔리는 音 를
새들은 어둔 하늘로 날고 살 속에서는 신열을 앓는 뼈가 사뭇 떠는 오한을
누기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잠깐씩 돌아다본 들판에 돌아다볼 때마다 눈발이 굵어지는 셋째 풍경
속에서는
눈꺼플에 점점이 점 찍힌 점무늬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반점들
의 하염없는 나부낌을
아득하게 깊어진 눈구멍 속에서 속날개를 털며 자잘하게 날갯질도 하는
설렘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물굽이와 들판과 나를 덮고 묻는 눈발이 자욱하게 쏟아지는 마지막 풍
경 속에서는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딧치며 몸 부수는 저것이
폭설인 것을
따로 이름 지어 부르지 않았다. 깜깜하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누구인
가 그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얼음꽃
죽음이 지루했으므로 그는 뒤채며 몸에 감긴 수의를벗었는데
살 까풀에 내비치는 속살이 흰 것 하며, 옆구리와 오금에 드리운 살 그
늘이 연한 것 하며, 사타구니와 손등에서 터럭 자라는 것 하며, 손톱 발톱
의 각질이 투명한 것 하며
눈 감은 지 몇 해째인데 아직 다 죽지 못한 안타까움까지.
그렇게 간절한 것 말고도 몸이 휘도록 사무쳤던 것은
처음으로 그가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숙이고, 허리 걲어서 바작 귀대고 ....... 그러나
들리는 것은 이빨 자라는 소리, 분이었다 차고 단단하고 잇몸이 얼어붙는
이빨 끝이 시린, 이 고요
가슴을 때리다
바위에 이마 대고 오래 울다 간 사람이 있다. 바위가 젖어 있다.
바람에 등 대고 서서 등 뒤가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다.
등판에는 바람 무늬가, 등덜미에서 바람의 잇자국이 찍힌 사람이 있다.
무릎걸음으로 걸어서 닿은 사람 있다. 물 바닥에 무릎 꿇은 사람 있다.
두 손바닥 포개 짚고 엎드려서 이마를 댓던 자국이 물에, 우묵하다.
바짝 마주 대고 마구 누구를 때렸던가. 움켜진 주먹이 멍들었다
한잎
툭, 잎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한 나무가 허리를 굽혔고 잎 떨어뜨린 가
지를 아래로 숙었고
굽은 한 나무의 숙은 가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는 딱, 한 잎이 내려다
보이고
굽은 한 나무의 숙은 가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는 딱, 한 잎의 더 아래
로 느리게 지나가고 있는 한 사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한 사람이 느리게 지나간 다음에는 인적 끊겼고, 인적 없는 나무 아래는
빈 것이다. 그렇게 말씀 한 대로
굽은 한 나무의 빈 아래로 더 아래가 한없이 빈 저어 아래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한없이 빈 저어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려가는 딱, 한 잎이 가뭇가뭇
내려다보이고
낡음에 대하여
낡음 때문이다. 눈 내리는 겨울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다시 겨
울이 오고 눈은 아직 내리는 것,
낡음 때문이다. 살갗의 무늬를 밀며 바람이 지나가는 것, 온 몸으로 바
람의 무늬가 밀리는 것, 서로 닳아가며 살 비비는 것,
낡음 때문이다. 자주 목쉬는 것, 더 자주 날 저무는 것, 또 물 위에 눕는 것,
낡음 때문이다. 늘 붉고 이마 붉는 것 못 박는 소리 들리는 것, 사람이
박히는지 걱정하는 것,
낡음 때문이다. 구부리고 이름 부르는 것, 땅바닥에 얼굴 부딧치는 것,
낡음 때문이다. 돌아오는 사람이 야위는 것, 느린 그림자를 끌며 늦게
돌아오는 것,
낡음 때문이다. 추운 날은 반드시 등이 어는 것,
살 벗고 웅크리고 잠에 드는 것, 자면서 뼈가 비는 것, 빈 눈확에 어둠이
고이는 것, 낡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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