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야기 서두처럼 / 이하석
내보이기 싫은 듯, 눈이 설 덮어놓은 오르막길. 미그러워서 길섶 뽀족뽀족
듣은 마른 풀들만 밟고 올라간다. 발밑 버석대는 소란은 굳은 얼음의 마음들
이 서로 치대어서 부러지는 소리. 그래도 딱딱 도시의 지하 바닥을 고르고
다지던 심한 잠꼬대 소리와 달리 아주 앙칼지거나 냉정하진 않다.
내려오는 길은 이미 바쁘게 찍은 발자국들이 촘촘하다. 미끄러지면서도
용캐 넘어지지 않은 채 끌린 흔적들. 가족들에게 밤새 죄를 빌고, 날 밝기 전
큰일 한다며 서둘러 달아난 가장(家長)의 흔적 같다. 그 길을 화를 참느라
하얗게 질린 성긴 눈발이 어영부영 덮는다. 그러나 회색 산 위 두텁게 꿰맨
하늘의 실밥 터진 데서 새어나오는 성깔 매서운 바람은 집 나간 죄 덮는 눈
발 헤작인다.
오래 바깥잠 자던 이의 귀갓길도 그렇게 덮히고 드러난다. 옛이야기의 서
두처럼 안으로 휘어도는 길을 겁내어 길섶의 얼은 풀들만 수북한 구름인 양
밟아가는 조심스러운, 어지럽게 설레는 마음이 찍는 발자국들.
산시 (山詩)
큰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눈사태에 이어서
말도 안 되는 것들의 속 덜컥 잠궈버리는 침묵.
그 침묵 지키는, 바람이 깎아낸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나무들.
겨울살이 내내 메아리 닫은 언어들의 표면들은
햇살 속 그늘진 채 꽝, 꽝, 얼어 있다.
얼이 간 얼음 위에 미끄러진 침입자들의 발자국들이 어둡게 깨져 있다.
산 밖으로 난 길이 자주 막혀도
두터운 눈 위를 느슨하게 헤쳐놓은 사람의 발자국들.
그 발자국과 어긋나게 상한 속 달이며 복잡하게 얽히는 숲 아래의 짐승
길들.
그 중 가장 많이 상한 바람길은 짐승 쫓는 이의 생애처럼
골짜기 아래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장터묵
바람이 지우고 지워도
늘 새로 밝혀 서는
먼 데, 높이
나, 앉은,
첨심(天心)나누는 장터
가쁜 숨으로 우련하게 올라서면
낮게 엎드린 채 고개 드는 악착으로
울컥, 원추리 피어 있는
구름 위로 뉘 부르는 한 소절 더 높은
바람목
지리산행
피아골의 가을 소식이 자주 눈에 밟힌다
나무들이 저마다의 영역을 가지면서 서로 우거지는 곳.
그래, 환하게 깊은 거기.
덜 떨어진 잎들 서로 불려 몰려다니고,
단풍은 돌 많은 비탈마다 붉은 감정 사무치게 켜 놓았겠지.
산죽 얽힌 가팔막진 비탈 기어올라 겨우 서는 생각 끝에
생활은 우리에 갇힌 반달곰처럼 왈칵, 검은 벽으로 막아선다.
그래도 지리산에 갔다 온 옷과 양말들이 아파트 이웃 베란다에 걸려 있으면,
그런 날은 직장 가는 중년 사내의 월요일 전망이 백무동 계곡처럼 울퉁불퉁 하다.
흐린 골목 빠져 나가다 돌아보면 키 큰 사시나무처럼 푸드득거리며
누가 또 지리산 갔다 오는 게 보인다.
급한 마음 곧추 세워 흐르는 골짜기의 물소리 헤아리는지
혼자 밥 먹는 이의 이마에 구름 그늘이 희게 드리운다.
그 생각의 언저리가 단풍처럼 붉어지면 주말엔 꼭 한 이틀 뱀사골에서 풀고
오겠다며 슬리핑빽이랑 라면이랑 미리 챙기는 이 있다.
반야봉 오르는 산비탈 소식이 또 급하게 경사진다
남한강
몸의 70% 이상이 물이라서 사람 사는 게 다 솨 하고 물 흐르는 소릴 내는
거란다. 그우스갯소리가 왜 모두를 강물처럼 굽이치게 할까? 아리랑 한 자
락 구성지게 우러내는 이의 강이, 그렇게 저무는 제 생풀이의 후렴처럼, 흐른다
저녁이 몰려오자 허기처럼 어두워진 풀덤불에서 매운 연기 솟구친다. 하루 일
막 끝낸 공공근로자 서너 명이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몇 잔의 술로 속 태우며
깡마른 귀들 세우니 강물이 먼 북소리처럼 울렁이며, 참 검게 속 감추어 흘러간다
그 우여곡절마다 소주 같은 생의 푸른 그림자들 어울려 이룬 여울소리 희게
부셔져 내린다
* 서정시학 2010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