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길에서 만난 스승

주선화 2010. 4. 28. 13:34

길에서 만난 스승              / 박재현

 

 

 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이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시험을 마치고 일찍 집으로 향하는 전철에서였다. 비도 오고 기분도 축축해서 전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앉고 보니 하필 경로석이었다. 다른 자리로 갈까 하다가 좌석들도 텅 비어 있고 해서 무심히 앉아 있는데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신사 한 분이 옆에 와 앉으셨다. 그런데 그냥 앉으신 것이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으려던 여대생을 꾸짖으며 쫓아 내고 앉아셨다. 경로석인데 젊은 것들이 앉으려는 게 불만이셨던 모양이다. 나는 그 불똥이 나에게도 튈까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어른께서는 평소 대학생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는지, 요즘 학생들은 버릇이 없다고, 대학생들도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계속 혼잣말을 하셨다. 옆에 앉아 있던 나는 혹시라도 나를 꾸짖지는 않으실까 조마조마했다.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채셨는지, 아니면 그 죄없는(?) 여학생을 몰아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른께서는 나에게 말을 붙여 오셨다.

 

 “자네도 대학생이지?”

 나는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각오하고 있는데, 학교는 어디며 몇 학년이며 군대는 갔다 왔는지 몇살인지 차례차례 물어보셨다. 나는 가급적 반듯하게 보이려고 애쓰며 성의껏 대답해 드렸다. 그런데, “전공은 뭔가” 하고 본격적으로 질문을 하셨다.

 “네, 국문학 전공입니다.” 이 말이 화근이었다.

 “오호라, 국문학을 전공한다면 내 할 말이 많지.”

 어른께선 대뜸 종이를 내놓으라 하시며 내게 가르쳐줄 말씀이 있다고 했다. 나는 가방에서 공책과 볼펜을 꺼내 어른께 드렸다. 그리고 공책을 펴들고 물어보셨다.

 “자네 이태백을 아는가?”

 “네, 압니다.

 “이태백이 어느 때 사람이지?”

 나는 말문이 막혔다. 갸우뚱하는데, “요즘 애들이 이렇다니까. 그럼 두보는 알지? 두보는 어느 때 사람인가?”

 “이태백과 같은 시대 사람이죠.”

 그나마 그거라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공책에다가 한자를 적으시더니 또 물으셨다. 그러나 역시 알 턱이 없었다.

 磨. 鐵. 杵.

 집에 와서 옥편을 한참 뒤져본 후에야 알았지만 뜻은 이렇다. 철을 갈아 공이를 만든다는 말로 무엇을 하려거든 인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함을 이른다.

 

 이태백은 천년 전 사람이다. 이태백이 산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만하면 됐다 싶어 산을 내려오는데, 한 노파가 커다란 쇠몽둥이를 바위에 갈고 있었다. 이태백이 뭐하시느냐고 묻자 노파가 한 대답이 磨鐵杵, 이 세 글자였다. 그래서 이태백은 충격을 받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공부를 더 해서 나중에 큰 시인이 되었단다. 그 어른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거기에 덧붙여 어른은 몇 글자를 더 적으셨다. 初志一貫. 한 번 품은 뜻은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뜻일 터. 그 말씀을 고맙게 받아들고서 전철을 내렸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 다음 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른께선, ‘시간이 되면 같이 좀 더 가면서 더 많은 말을 해줄 텐데’하는 눈치셨지만 나는 차마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다. 한자를 제대로 못 읽는 내 무식의 소치가 부끄러워서였다. 명색이 국문학을 전공했다면서 그 정도 한자도 못 읽어내는 이 날라리 대학생놈이 어른께선 얼마나 한심했을까. 하지만 천자문도 안 뗀 아이가『詩經』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어른께 꾸벅 인사를 하고 전철역에 내리고 보니 아뿔싸, 어른의 존함을 안 물어 본 것이다. 그러나 전철은 이미 역을 따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三人行必有我師라더니, 내가 오늘 스승을 만났구나.’ 성현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치고 그릇된 것은 없다. 들으면 다 仁이 되고 德이 되는 말씀들이다. 그러나 공손히 들으며 자신을 반성할 줄 아는 젊은이는 요즘 많지 않다.

 세 사람이 귀가길 전철 안에서 만났다. 하나는 비록 쫓겨났으나 남은 둘은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제자는 오늘 세 개의 귀한 보물을 들고 집에 왔다. 이제부턴 길을 갈 때마다 나의 스승이 누군가를 잘 살펴볼 일이다. 이 자리를 빌려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나의 스승이 되어준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비록 그분의 존함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짧은 가르침은 내게 아주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  (0) 2010.05.07
[스크랩] 꼭 알아 둬야 할 우리 말  (0) 2010.05.07
[스크랩] 한시 모음  (0) 2010.02.04
유종호의 '시와 말과 ....발간  (0) 2009.12.30
나무와 새  (0) 2009.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