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황혼 단가 / 박이화

주선화 2011. 2. 21. 23:19

황혼 단가 / 박이화

 

 

1

  내 사주 일지엔가 월지에 초경처럼 부끄러운 도화살 태몽으로 복숭아 꽃목 똑, 똑, 따버린 벌일까? 그럼 서녘 쪽문 궁금히 열고 나온 천도복숭나무 한 가지 우직, 꺽어 일몰에 빗대 후려친 그대 겨운 피 어찌 감당하려는지

 

  2

  가끔 황혼이 그 붉고 도발적인 입술로 저녁 외출하는 걸 봐요 그런데 금세 지워져 돌아오던 걸요 꼭 내가 당신을 만나고 올 때처럼 당신이 삼킨 태평양 재즈-래드 립스틱 그래서 당신 피가 점점 더 붉고 뜨거워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지만

 

  3

  누군가 저녁 하늘 빈 모서리에 붉고 선명한 낙관을 찍는다 그처럼 나, 그대 생애에 노을처럼 아름다운 마지막 여자일 수 없을까?

 

  4

  황혼이 내 나이 마흔을 택해 마흔이 황혼인 여자를 택해 자꾸 미치라 한다 미칠 수 있는 피를 주고 미칠 수 있는 시를 주고 어서 미치라 한다 양귀비꽃처럼 독하고 붉게 미쳐 버리라 한다

 

  5

  마침내 그가 내 마흔의 삶 속으로 저녁하늘처럼 저벅저벅 걸어왔다 내 이제 한 폭의 석양으로 아름다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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