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다만 바람이 불었다 / 오세영

주선화 2016. 9. 27. 10:58

다만 바람이 불었다 / 오세영



당신이 나를

이 쓸쓸한 해안으로 불낸 것은

분명 어떤 생각이 있어서일 터인데

나는 그 생각을 모르겠다.

언덕에 핀 해당화의 생각도

부질없이 밀려들고 쓸려가는 파도의 생각도

그 백사장에 누군가 짓다 반나마 허물어진

모래성의 생각도 ……

다만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꽃잎이 흩어지고

그 바람에 파도가 일고

그 바람에 모래가 꿈틀거렸다.

모두가 바람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바람은 정작

왜 그런 장난을 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꿈꾸듯 꿈꾸듯 그의 손길에 끌려

땅끝까지 온 나에게

다만

당신은 밤을 기다려라 한다.

바람에 돛폭을 활짝 편 쪽배를 타고

너도 물때에 맞춰

이 무서운 바다를 건너라 한다.

너도 이제 바람을 타라고 한다.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린 가랑잎들이

바람에 휩쓸려

하롱 하롱

푸른 하늘을 건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