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바람이 불었다 / 오세영
당신이 나를
이 쓸쓸한 해안으로 불러낸 것은
분명 어떤 생각이 있어서일 터인데
나는 그 생각을 모르겠다.
언덕에 핀 해당화의 생각도
부질없이 밀려들고 쓸려가는 파도의 생각도
그 백사장에 누군가 짓다 반나마 허물어진
모래성의 생각도 ……
다만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꽃잎이 흩어지고
그 바람에 파도가 일고
그 바람에 모래가 꿈틀거렸다.
모두가 바람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바람은 정작
왜 그런 장난을 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꿈꾸듯 꿈꾸듯 그의 손길에 끌려
땅끝까지 온 나에게
다만
당신은 밤을 기다려라 한다.
바람에 돛폭을 활짝 편 쪽배를 타고
너도 물때에 맞춰
이 무서운 바다를 건너라 한다.
너도 이제 바람을 타라고 한다.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린 가랑잎들이
바람에 휩쓸려
하롱 하롱
푸른 하늘을 건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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