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 / 문혜연

주선화 2021. 1. 11. 10:52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

 

ㅡ 문혜연

 

 

오늘 밤은 공기에서 종이 냄새가 나요

나뭇잎들이 가장 예쁠 때

젖은 몸을 던지는

 

어떤 새의 발톱은

나무를 붙들기 위해서만 쓰인다던데

 

나무들은 대체 언제부터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을까요

깊이도 무게도 알 수 없는

둥지 하나를 매단 채로

 

손목에 새를 새긴 아이는

밤새 손목이 두근거려서

밤을 없애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밤을 마지막으로

 

밤이 사라진 세계에는

실수가 없고 꿈이 없어서

나무들이 하얗게 세어 버린다고

 

노인이 아이의 등을 쓸어줍니다

아이는 자신의 온 등으로

노인의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을 느끼고

가끔 둥글고 뜨거운 것이 내려가고

 

새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숲에 말간 얼굴을 감춰요

나무는 점점 더 희고 묽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이곳은 흰 나무의 숲

젖은 종이 냄새가 나요

훗날 발견된 글자처럼

 

새를 주운 아이는

손안의 심장이 뛰는 리듬을 잊지 못합니다

지그시 눌려보면 두근거리는

 

돌아갈 밤이 없는 아이는

둥지를 더듬습니다 까치발로

새들의 둥근 어깨를 훔치고

 

흰 나무에 남은 줄무늬 같은

흔적만이 그 밤을 기억합니다

노인은 자기 손바닥을 쓸어보며

작은 등 하나를 기억하고요

 

아이가 사라진 세계는

붙잡혀본 적 없는 손목들만 남아서

긴 소매 속으로 자라나는 어둠

 

낮과 낮의 사이로

문득 겨울이 옵니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그렇게

떼를 놓친 새들이 살아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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