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말문 / 김지헌

주선화 2021. 1. 1. 16:14

말문

 

ㅡ 김지헌

 

 

하늘이 말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장맛비에 꽃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진흙을 뚫고 수련이 말문을 열었다

 

과묵을 늘상 달고 다니던 아이가

아기아빠가 된 것만큼이나

저 수다스러움은 위대하다

 

살아 있다고 소리치는 거

꽃이 잠깐 한눈판다 한들,

내가 엄마를 찢고 나와 처음 말문을 열었을 때

엄마도 그랬으리라

 

공원묘지의 봉분들, 말문을 닫은 그 이유라는 거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다

 

정선 비행기재를 지나는데

한여름 적요 속 터널이 속사포를쏟아내고 있었다

살기 위해 죽을 힘 다하는 폭포수처럼

고요라는 평형수가 터널의 말문을 닫아버린다

 

언젠가 말이 문을 닫을 때

그때를 위해 문장 하나는 남겨놓아야 한다

한 줄 휘갈겨 쓴 번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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