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가체프* 하나 주세요
ㅡ 정강영
이따 거기서 봐
데이트가 늦어진다 해도
마지막버스를 탈 수 있는 지점의 카페
누구든 먼저 오면 혼자라도 커피를 주문했다
그가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처음 말을 꺼냈을 때부터 여덟 번째,
씁쓸함 끝에 살짝 스치는 달큼함을 붙잡고 온
시간들이 커피 향에 희석되어 조금씩 사라졌다
부옇게 번지다 결국 흩어지면서도
산화의 의미를 갖가지로 미화시키던 커피
에디오피아 커피는
이국 수십 억 인구에게 쉼을 주었지만
노새의 목줄을 말아 쥔 손으로 머릿짐을 잡고
업은 아이가 허리춤에 내려와도
추스를 수 없어서 걸음만 재촉하는 여인,
커피콩과 그녀의 일상이 따갑게 볶아졌다
하마터면, 그렇게 아이를 낳아 기를 뻔 했다
그때 나에게
노새는 없어도 시간은 있었다
무기한의 보류도 가능했지만,
옮겨간 일터에서 달려온 그에게서
처음부터 내가 좋아했던 풋풋함을 다시 보았다
끊어질 듯 이어온 만남은 서로를 타래삼아
제법 두툼한 필연으로 이미 감겨있었고
가시를 다듬은 하얀 장미부케와
어깨가 드러난 하얀 망사드레스와
하얀 면사포 속 신부는 이듬해 오월,
예가체프의 체면에 걸렸다
*예가체프 ㅡ 커피의 귀부인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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