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은 그 몸속에 사다리를 갖고 있다
-배종영
그동안 마음 주었던 나무들이
눈앞에서 자라는 순간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무들은 겉으로는 그냥 쑥쑥 자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몸속 물관의 기둥에 비스듬히 사다리를 받쳐두고
가지의 저 끝 연둣빛 햇순들을 차례로 올려보내는 것이다.
그 햇순을 흔드는 높은 바람도 사실은
나무 속 사다리를 얻어 타고 올라간 것이다.
심지어 꽃들도 씨앗들도 살금살금
사다리를 기어오른 것들이다.
특이한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오른다는 것이며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치워 버린다는 것이다.
나무들이 사방에 가지를 걸쳐두는 것도
바쁜 나무의 속을 배려해 겉에다
그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봐라, 내 눈에 들키고 만 저 낙하하는 이파리들은
사다리가 없어 뛰어내리는 중이다.
열매들이 툭툭 떨어지는 것도
물방울의 본성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저 푸릇한 꼭대기가 가장 깊은 수심인 것이다.
아찔한 곳이란 가끔 위아래를 바꾼다.
지는 것들은 눈에 보이고
피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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