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훌륭한 밀월 / 윤선

주선화 2023. 9. 27. 09:25

훌륭한 밀월

 

-윤선

 

 

붉은 해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었다

 

과수원 밭집에서

종일 책 속에 빠져 있다가

우물가에서 발을 씻고 있었다

 

그때

알 듯도 한 그 사람이

과수원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빨리 사과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온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미나리꽝에는 낮은 바람이 물결처럼 일었다

 

그는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먹음직하게 잘 익은 사과를

광주리 가득 따서 담았다

 

나무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는 마치 미나리꽝을 다녀가듯

광주리를 옆에 끼고

유유히 과수원을 빠져나갔다

 

사립문에는 그의 윗도리가 걸려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울타리에는 무성한 풀이 돋고

바람이 불 때는 그의 윗도리에서

보랏빛 나팔꽃 종소리가 울렸다

 

줄 것도 없는 내게

보여줄 것고 없는 내게

광주리를 들고 걸어 들어오는

알 듯도 한 그 사람

 

사과를 한 입 가득 베어 먹는 시간이

달콤하고 황홀한 밤이었다면

훌륭한 밀월이다

 

일찍이 내게

소리 없이 붙잡혀

붉은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이

슬쩍 빼앗기는 것이

사과의 미덕이라고 알려 준

 

알 듯도 한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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