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당근밭 걷기 / 안희연

주선화 2024. 7. 10. 08:48

당근밭 걷기(외 2편)

 

-안희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머잖아 내가 당근을 수확하게 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을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당근밭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밤 가위

 

 

가위는 가로지르는 도구다. 가위는 하나였던 세계를 둘로 나누고 영원한 밤의 골짜기를 만들고 한 사람을 절벽에 세워두고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발아래, 당신의 발아래 내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지 말아요.

 

절벽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는 있다. 그는 밤 가위로 밤을 깎는다. 밤의 껍질은 보기보다 단단하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하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는 밤의 둘레를 따라 천천히 걸어 하나의 접시에 당도한다. 당신 앞에 생밤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

 

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면 제가 보낸 슬픔인 줄 아세요. 나는 아직 절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간섭

 

 

돌을 태운다

시실은 돌 모양의 초

 

누가 나를 녹였지?

누가 나의 흐르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지?

돌이 나의 질문을 대신해주기를 기대했는데

 

돌은

자신이 초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무고하게 빛난다

 

돌이 녹는 모양을 본다

돌 아래 흰 종이를 받쳐두어서

흐르는 모양 잘 보인다

 

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겪는구나

너는 네개 불붙인 손 사랑할 수 있니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

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제 머리카락은 심지가 아니에요

발끝까지 알아서 태울 테니 불붙이지 마세요

 

흰 종이 위에 스스로 올라서서 하는 말

 

또 한번의 밤이 지난다

아침이 오면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인다

어떻게 참아냈는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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