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안지은
찢어진 식탁보로 만든 애인,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내가 보인다
애인에게 발이 너무 많아
어디든지 갈 수 있으나 어디로든 가지 않았다
지옥엔 다 자란 네가 있어
애인의 예언에 열대야를 기르는 나날들
귀를 막으면 별자리들이 바람에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더 이상 운세를 믿지 않았다
꿈만이 구원이라 믿었는데
꿈에서 애인이 죽었다
누구의 꿈인지 누구의 애인인지 알 수 없어
모두의 꿈이 섞이는 새벽에 자주 깼다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헷갈려서
뜬 눈으로 앞을 보지 못하고
벽을 더듬는 것을 키스라고 부르고
혀를 섞으면 검게 그을린 손가락들이 숲을 이뤘다
죽은 애인은 매일 살아서 돌아왔다, 살을 찌워서
나는 애인으로 불꽃놀이를 즐겨 하고
떨어진 살점을 주워 먹었다, 가끔
눈을 감아도 애인이 보였다. 우리는
핏속에 유리가 흘렀다, 유일하게
진심을 불태워 불행을 만들 줄 알았다
허공이 벽처럼 단단해질 때
얼굴에서 숲이 자라났다, 애인은
얼굴에 커튼을 드리울 때를 밤이라 불렀다
커튼을 식탁보로 쓸 때를 죽음이라 불렀다, 나는
찢어진 식탁보를 기운 것을 애인이라 불렀다
우린 재봉틀로 박아놓은 혈육
내일은 당신이 살고 내가 죽을 거예요
나에게 애인이 너무 많아
언제든 죽을 수 있으나 언제나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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