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손
-차도하
이 시에는 공원이 등장하지 않고, 시인이 등장하지 않으며, 사랑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에는 공터가 등장하고, 중학생이 등장하며, 등장할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한다.
중학생은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공원은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공터는 비어 있는 터이기 때문에 공터. 그렇다면 중학생의 마음도 공터. 공터인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중학생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는 아빠에게서 훔친 것. 아빠를 사랑할 수 없는 것. 가족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 친구도 애인도 사랑할 수 없는 것. 선생과 제자라면, 신과 신도라면 더더욱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떠나서. 그 모든 관계가 아닌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중학생이 생각하는 동안
담배는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중학생이 고개를 조금 숙이고 담배와 연기를 바라보는 동안.
세상의 필터도 조금식 타들어 가고, 세상의 모든 관계가 지워지고. 비어있는 곳 빼고 모든 것이 지워져서.
세상엔 공터만이 남았다.
공터에 덩그러니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울거나.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만이 남아
세상은 한층 조용해졌고. 중학생이 문득 고요를 느끼고. 담배를 버리고 신발로 그것을 짓이기고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은 저녁에서 밤으로 색깔을 바꾸고.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오고.
원래란 뭐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중학생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중학생은 담배 냄새가 빠질 때까지 산책을 좀 하다가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담배 냄새는 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학생이 하는 질문은,
혼을 낼까? 혼을 내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는 체벌.
중학생의 마음을 공터로 만들게 한.
그러나 우선은 공터에서 빠져나와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산책을 하기로 하고, 중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다가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
그것은 기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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