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김휼
긴 목으로 빈 병이 서 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참이슬 빈병에 간장을 붓는다
개별로 찬란했던 이슬이 검은 어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동안
상반된 조합이 얼마간 충돌을 일으켰다
미역국을 끓이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하다
맑고 투명한 이슬이 검은 어둠이 되는 속도라든지 누군가의 생에서
어둠은 빛보다 더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괴로워했다
빛을 담아 우릴수록 검어지던 간장독을
오래도록 빛을 품고 깊어지는 사이
극단적인 맛을 즐기던 이들의 혀도 순해져 갔겠지
시나브로란 이럴 때 필요한 말
조금 전까지 빈 병이었던 참이슬 뚜껑을 연다
간장 한 숟갈이 더해지니 감칠맛 나는 미역국
곰삭은 어둠의 맛에 울컥해지는 오늘
나는 빈 병의 긴 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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