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부재 / 김휼

주선화 2024. 8. 4. 15:44

부재

 

-김휼

 

 

긴 목으로 빈 병이 서 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참이슬 빈병에 간장을 붓는다

개별로 찬란했던 이슬이 검은 어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동안

 

상반된 조합이 얼마간 충돌을 일으켰다

 

미역국을 끓이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하다

맑고 투명한 이슬이 검은 어둠이 되는 속도라든지 누군가의 생에서

어둠은 빛보다 더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괴로워했다

 

빛을 담아 우릴수록 검어지던 간장독을

오래도록 빛을 품고 깊어지는 사이

극단적인 맛을 즐기던 이들의 혀도 순해져 갔겠지

시나브로란 이럴 때 필요한 말

 

조금 전까지 빈 병이었던 참이슬 뚜껑을 연다

간장 한 숟갈이 더해지니 감칠맛 나는 미역국

 

곰삭은 어둠의 맛에 울컥해지는 오늘

나는 빈 병의 긴 목이 된다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로라 콜 / 숙희  (0) 2024.08.06
오징어입 버터구이 / 고명재  (0) 2024.08.05
송호리 / 박길숙  (0) 2024.08.03
혀로 염하다 / 길상호  (0) 2024.08.02
엠페리파테오/ 김안  (0) 2024.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