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불 지르기 전에 / 김복희

주선화 2024. 9. 12. 09:46

불 지르기 전에

 

-김복희

 

 

안녕 내가 집을 불태우려고 해

그런데 우리 집을 불태우면

옆집이 불탄다고 해

그런데 옆집이 불타면

그 옆집도 불탄다고 해

 

실로

검은

그림을 위한 밑 색을 칠하려고 해

그러러면

 

잘 가

석양

잘 가

지난 밤 정전

잘 가

어린애의 불

잘 가

여자의 피

잘 가

피에 젖은 물

잘 가 잘 가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까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잘 가

 

살점을 베려면 피를 흘려야 하듯이

나는 세상을 이해해야 하는 거야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과 잔가지와 전선과 높은 건물의 끄트머리와

내가

세상을 잠깐 어둡게 할 수 있다는 것

반가워

작은 새

반가워 잔가지

반가워 전선

반가워 반가워

아주 좁은 악마의 유리병 속으로

들어가듯이

 

안녕

환영해

 

이런 건 삶이 아니라고

불 지르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