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소란 / 박소란

주선화 2024. 10. 18. 07:34

소란

 

- 박소란

 

 

우연히 만난 동명(同名),

그는 자신을 여행자라 한다

 

나는 모르는 이야기

 

나는 모르는 곳

안개 자욱한 산맥을 오르고 인적 끊긴 해안가에 앉아 일몰을 보았다고

 

나는 모르는 소란

 

왠지 조금 쓸쓸하기도,

그러나 곧 당도한 야간열차에선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 농담처럼

 

소란씨, 부르자

얼굴이 붉어지고 전에 없던 기분에 사로잡혀

 

상상해본다

 

이대로 문을 박차고 달리는 나를

지하 클럽에서 탱고를 추고 이름 모를 날들을 연주하는 나를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시 같은 건 쓰지도 읽지도 않는

 

소란

먼 소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늦지 않게 목적지에 닿았나요?

 

그는 말한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었다고

 

세탁소에 가려고 나와서는 한참 동안 골목을 헤매요 밤에는 지진 때문에 잠을 설치고

결국 잠들지 못하고

커튼을 젖히면 난데없는 설원이 펼쳐져

 

블리자드가 휘몰아치는 창밖을 어리둥절 바라봐요

서둘러 배낭을 챙겨요 낡은 외투를 여며요

기다려도 마을버스는 오지 않고

 

눈 앞에 뒤뚱뒤뚱 그려진 발자국, 빠르게 지워지는

 

소란

나도 모르는 뒷모습

 

나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안녕을 빌며

 

이런 내가 싫다고

이런 내가 쓰는 이런 시가 싫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시 / 한강  (4) 2024.10.21
엘리베이터 / 김솜  (2) 2024.10.19
팽이의 방정식 / 남상진  (0) 2024.10.16
재생 / 박소란  (0) 2024.10.12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 금시아  (3) 2024.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