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신년 운세 / 고선경

주선화 2025. 2. 26. 09:11

신년 운세

 

- 고선경

 

 

나는 남을 돕는 팔자라고 그랬다

그렇게 말한 사주쟁이가 한둘이 아니다

 

잘 봐

내가 얼마나 쉽게 슬퍼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

 

나를 슬프게 만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슬플수록 사나운 표정을 짓게 되는 내가 있고

사나운 표정을 해명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행운의 색깔은 하늘색

오늘 내가 가진 물건 중 하늘색은 하나도 없네

 

누군가는 모든 게 나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그랬다

도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도 꼭 이루어질 테니 기쁨이라고

 

제일 친한 친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흔 살 되면 다 해결될 건데 뭐가 문제?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이지

 

팔자가 싫을 때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

라고 적었다

월급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대 가스가 끊겼을 대 이십

육인치 캐리어 질질 끌고 남의 집 전전했을 때

 

보세요 부의 기운을 담은 부적입니다 영민함을 상징하는 

토끼 두 마리가 그려져 있지요 아 그건 한정판 순금 부적

이에요 승천하는 청룡과 여의주가 길한 기운을 가져다

줍니다

 

단돈 칠만 원

없어 임마

 

내가 태어난 게 대길인 줄이나 알아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길래

창문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했다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을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