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사과를(외 1편)
-주향숙
꿈같은 거 꾸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
그냥 살까 하다가도
여자는 아이를 낳고 사과는 사과를 낳고
누는 누를 낳고
아이를 낳는 동안 구름은 흩어졌고 여자는
첨탑 위의 시계처럼 늙어가네
눈을 감았다 뜨면
사과밭의 사과는 익어가고
전선 위
참새는 떨고
노래를 잊은 기타 줄은 흔들리고
노래는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사과가 익어가는 마을에는
은하수가 내리고
사랑 같은 거 하지 말고 당신한테 가지 말고
그냥 살까 하다가도
나는 나를 낳고
누는 누를 낳고
연필의 태도
연필 깎는 자세는 꼿꼿하죠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연필을 깎아요
사각사각 햇살을 깎다 보면
마음이 생기고
마음을 깎다 보면 빙긋
웃음이 나고
연필 깎는 자세는
나무밥이 켜켜이 쌓이는 경험이죠
거꾸로 매달리는 철봉처럼
왔다 갓다
왔다 갔다
음악이 경계를 넘나들어요 세상을 향해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연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
너무 뾰족하지는 않게
너무 뭉특하지는 않게
햇살 좋은 봄날은 온종일 고개 수그리고 글씨만 쓰고 있죠
필경사의 수염이 되기도 하고
호흡이 가지런한 문장이 되기도 해요
*주향숙 시집 <너는 야구를 좋아하는 걸까 야구공을 좋아하는 걸까>
ㅡ시인동네 시인선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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