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에 기대다(외 1편)
-박설희
최루탄 난무하는 교정, 굶주린 배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스물한 살
몸은 뜨거웠으나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
지리산 종주길에 나섰다
그래도 나눌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라고
말라가는 풀에, 갓 피어나는 꽃에, 시든 나무뿌리에
핏방울을 뚝 뚝 흘리며 걸었다
빈혈을 앓는 내 삶에
수혈하듯이
연하천 벽소령 장터목·····
몇 송이 꽃 피웠을까
풀 한두 포기 튼실히 뿌리내렸을까
천지만물이 동기간
물보다 진한 피를 나누었으니
잘 견디고 살아남자는 약속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며, 잃기를 원하며
어둠 속에서 네발로 기며
길과 길 아닌 걸 구별하며
피를 나누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을 때
촉수를 뻗어보듯이
피의 길을 늘여갔다
길은 계속 비탈이었고
비탈이어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려는
나를 받아주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골똘히 지켜보고 있었다
초대
우리 집에 놀러 와
감자밭 가장자리를 지나
시냇물 돌징검다리 건너
조팝꽃 쪼르르 피어 있는 오솔길
혼자 오지 말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심심한 구름을 데려와
정처 없이 나폴거리는 나비
맑고 서늘한 새소리와 함께 와
사심(私心)은 두고 와
가볍게 가볍게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나
소나무 우거진 숲으로
백 걸음쯤 걸으면
네 키의 열 배나 되는 바위가 졸고 있지
그 바위를 돌아
왼쪽으로 맑고 고요한 내를 끼고
목적지가 어디였는지조차 잊어갈 무렵
너른 공터에 햇살 가득한
막다른 그곳
*박설희 시집 <우리 집에 놀려 와>
ㅡ시인의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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