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비탈에 기대다 / 박설희

주선화 2025. 5. 19. 10:54

비탈에 기대다(외 1편)

 

-박설희

 

 

최루탄 난무하는 교정, 굶주린 배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스물한 살

몸은 뜨거웠으나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

지리산 종주길에 나섰다

 

그래도 나눌 수 있는 게 있어 다행이라고

말라가는 풀에, 갓 피어나는 꽃에, 시든 나무뿌리에

핏방울을 뚝 뚝 흘리며 걸었다

빈혈을 앓는 내 삶에

수혈하듯이

 

연하천 벽소령 장터목·····

몇 송이 꽃 피웠을까

풀 한두 포기 튼실히 뿌리내렸을까

 

천지만물이 동기간

물보다 진한 피를 나누었으니

잘 견디고 살아남자는 약속

 

안개 속에서 길을 잃으며, 잃기를 원하며

어둠 속에서 네발로 기며

길과 길 아닌 걸 구별하며

 

피를 나누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을 때

촉수를 뻗어보듯이

피의 길을 늘여갔다

 

길은 계속 비탈이었고

비탈이어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려는

나를 받아주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골똘히 지켜보고 있었다

 

 

 

초대

 

 

우리 집에 놀러 와

 

감자밭 가장자리를 지나

시냇물 돌징검다리 건너

조팝꽃 쪼르르 피어 있는 오솔길

 

혼자 오지 말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심심한 구름을 데려와

정처 없이 나폴거리는 나비

맑고 서늘한 새소리와 함께 와

 

사심(私心)은 두고 와

가볍게 가볍게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나

소나무 우거진 숲으로

백 걸음쯤 걸으면

 

네 키의 열 배나 되는 바위가 졸고 있지

 

그 바위를 돌아

왼쪽으로 맑고 고요한 내를 끼고

목적지가 어디였는지조차 잊어갈 무렵

 

너른 공터에 햇살 가득한

막다른 그곳

 

 

*박설희 시집 <우리 집에 놀려 와>

ㅡ시인의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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