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죽변항 / 안도현

주선화 2025. 5. 7. 10:01

죽변항
 
-안도현
 
 
뱃머리에 눈이 쌓이고
아프지 않은데 병들었고
슬프지 않은데 울었고
삿대질도 없이 멱살을 잡았어요
 
뱃머리에 쌓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골목 끝에서
라면에다 차가운 소주를 삼켜도 다 듣지요
뱃머리끼리 부딪칠 때 갈매기 우는 소리 나는 거
 
당신은 눈 내리는 포구를 보고 싶다고 말했죠
산통처럼 눈이 내려요
편견처럼 눈이 내려요
바다에 그물을 내리듯이
그물 속으로 도루묵 떼가 몰려오듯이
눈이 내리쳐요 보이나요 북방의 흰 빗금들이
 
뱃머리에 눈이 쌓이고
눈송이는 지상의 빈자리를 꿰매고
우리는 목덜미로 눈을 받으며
노란 노끈으로 구멍 난 그물을 꿰매요
점퍼 옷깃 안쪽으로 수북하게 쌓인 눈을 털어내며
 
하늘의 어깨에 근육이 붙었나 하고 생각해요
갈매기들 깃털이 긴장하고 있어요
바로 어제 포구에 새로 도착한 놈들이죠
말라붙은 생선 비늘을 봐도 아직은 이름을 모르죠
 
사소한 감정을 눌러 죽여야
파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에요
파도는 동정을 받기 싫어하죠
파도는 겉으로는 눈썹에 날을 세우고 속으로는
부드럽게 당신의 발끝을 어루만져요
당신의 뱃속에 들어앉은 등불이
켜질 시간인가요 멀리 있어서 둥근 불빛
 
눕지 않았는데 핼쑥해졌고
마시지 않았는데 불콰해졌고
엉키지 않았는데 풀어졌고
뜯어지지 않았는데 이어졌고
사랑하지 않았는데 허물어졌다고
뱃머리에 썼던 말들은
뱃머리에 눈이 쌓이면서 사라졌어요
 
오늘 잠들기 전에 적설량을 적어 보낼게요
금방 녹아서 사라지는 것을 꿈이라고 하나요
꿈의 해변에서, 곱아서 오그라든 손을 펴서
눈발처럼 길게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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