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71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 전형철(현대시학작품상)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ㅡ 전형철 세상의 모든 종말은 내 처음의 것. 말이 늦다. 유음을 배워 두고 받침을 잃어버린다. 문자의 유전자는 사라지지 않고 심장 아래 잘 끼워진다. 아직이거나 이미였던 것들에 달린 열성의 꼬리표. 날이 차면 산이 밝아진다. 코끼리 뼈를 상처없이 도려내고 한 줌 모래알을 쥐고 단풍잎에 한 손을 올린다. 배경이 사라지고 창살만 남는다. 손가락을 벌린다. 느리게 감옥은 커진다. 칸막이 하나다. 밤이 무덤을 열어 문에 들어 앉는다. 지키지 못할 임종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턱을 성호의 방향대로 긋는다. 신음은 낮고 치명적으로. 둥지에서 죽지 못한 아기 새에게. 부디. 산 자의 놀음. 죽은 자의 기도. 뒤로 돌아 걸으며. 세상의 모든 탄생은 나 다음의 일. 거기서 나는 그림자를 떠메고 간다.

문학상 2020.12.17

치(齒)

치 齒 ㅡ 이동욱 호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 물줄기는 날카로워진다 연약함을 가장하지 않는다 다시 아침 어김없이 남자는 옥상에 올라 채소에 물을 준다 채소는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있다 정확히 박스는 사각의 스티로폼, 하얗게 모여 있는 말이 위태롭다 옥상 아래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언제 깨어나 울지 모른다, 시커멓게 동굴 같은 입 가득 허기를 물고 남자에게 물을지 모른다 그건, 아직, 네가 알 수 없는 일 아내는 왜 나비를 좋아했을까 남자는 채소에 물을 준다 언젠가 하얀 뿌리까지 닿을 수 있을까 자주 뽑히는 너희는 왜 이다지 순종적인가 왜 우리는 반복되는가 어서 자라라 다시 돌아오지 말아라 남자는 호스를 움켜쥔다 우리는 무해한 짐승일까 초식동물 목덜미를 파고드는 송곳니처럼 담장 위로 박혀 있는 병조각이 ..

문학상 2020.08.31

치(齒)

치 齒 ㅡ 이동욱 호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 물줄기는 날카로워진다 연약함을 가장하지 않는다 다시 아침 어김없이 남자는 옥상에 올라 채소에 물을 준다 채소는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있다 정확히 박스는 사각의 스티로폼, 하얗게 모여 있는 말이 위태롭다 옥상 아래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언제 깨어나 울지 모른다, 시커멓게 동굴 같은 입 가득 허기를 물고 남자에게 물을지 모른다 그건, 아직, 네가 알 수 없는 일 아내는 왜 나비를 좋아했을까 남자는 채소에 물을 준다 언젠가 하얀 뿌리까지 닿을 수 있을까 자주 뽑히는 너희는 왜 이다지 순종적인가 왜 우리는 반복되는가 어서 자라라 다시 돌아오지 말아라 남자는 호스를 움켜쥔다 우리는 무해한 짐승일까 초식동물 목덜미를 파고드는 송곳니처럼 담장 위로 박혀 있는 병조각이 ..

문학상 2020.08.31

기린 / 김참

기린 ㅡ 김참 밀밭에서 놀던 기린이 우리 집으로 온다 마늘밭 지나고 도랑 건너 돌무더기와 대밭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긴 목 위에 있는 기린의 얼굴을 본다 참 슬픈 얼굴이다 보리밭에서 놀던 기린이 돌담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대문 앞 텃밭에 외할머니가 심어놓은 고구마를 넝쿨째 뽑아 먹으며 기린이 온다 밭에서 잡초 뽑던 이모가 고개를 들어 슬픈 얼굴의 기린을 올려다본다 나는 대문을 연다 열린 문틈으로 당근과 가지가 자라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비닐하우스 위로 새털구름 흘러간다 정오가 되면 배고픈 기린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굴뚝에서 모락모락 올라와 구름을 향해 새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연기를 꿀꺽꿀꺽 삼킨다 거미와 나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문학상 2020.08.24

가장자리/ 김소연(현대시 작품상 수상작)

바로 오늘이야 라고 읊조리며 가느다란 눈매로 먼 데를 한참 보았을 사무라이의 표정을 떠올려 본다 수평선이 눈앞에 있고 여기까지 왔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햇살에도 파도가 있다 소리는 없지만 철썩대고 있다 삭아갈 것들이 조용하게 삭아가고 있었다 이제 막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다 준비해 간 말들은 입술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 식은땀이 되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머리통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의 가장자리가 젖어갔을 때 눈앞에 있는 냅킨을 접었다 접고 다시 접었다 모서리에 모서리를 대고 또 접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 서 있는 걸까 오늘은 무슨 요일일까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다 기도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스프링클러의 물방울처럼 번지고 있다 빛이 퍼지는 각도로 비둘기가 날고 있다 검은 연인이 그늘 속에서 어깨..

문학상 2020.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