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커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1946년>
*
천지에 꽃피는 소리 가득하다 등성이는 등성이대로 기슭은 기슭대로 봄꽃들 넘쳐난다
껍질만 살짝 문질러도 생강냄새가 확 풍기는, 산수유 닮은 생강나무꽃, 사람 환장하게 하는 산복사꽃,
개살구꽃, 제비꽃, 메꽃, 달맞이꽃,애기똥풀꽃, 쑥부쟁이꽃, 본 적 있다
이 꽃들의 소요! 사람 홀린다는 흰동백꽃,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꿩의바람꽃, 아침이면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있다, 해가 나면 자줏빛 꽃잎을 활짝 연다는 바람난 처녀꽃, 얼레지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며느리배꼽꽃은 아직 못 보았다 저 꽃들의 고요!
" 어진 이는 만월을 경계하고/ 시인은 낙화를 찬미하나니/ 그것은 모순의 모순이다(한용운의 모순)
라고 했거늘,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속의 분별과 속도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리라
꽃은, 진 후에 더욱 꽃이기에, 지는 꽃의 슬픔을 이리 높고 깊게 맞을 일이다
"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 이 과묵한 슬픔 앞에 목이 멘다 (정끝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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