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해설 (鄭浩承 시인)
"이것은 詩集(시집)이 아니라 ‘통곡’ 이다. 이 시집은 인간이 쓴 시집이 아니다. 詩스스로 인간에게 걸어나와 쓴 눈물의 시집이다."
‘生存(생존)’ 과 ‘밥’
슬프다. 이토록 슬픈 詩集(시집)이 어디 있으랴. 아프다. 이토록 아픈 시집이 어디 있으랴. 눈물이 난다.
이토록 눈물나는 시집이 어디 있으랴. 시집 어디를 펼쳐도 붉은 피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그 눈물이 끝내는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룬다.
그렇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통곡’ 이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분노’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과 ‘비극’이다.
그래도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놓지않은 ‘희망’이다.
이 시집은 脫北(탈북)시인 장진성씨 한 개인이 쓴것이 아니다. 이 시집은 고통과 절망속에 사는 북한의 모든 인민들이 쓴 시집이다. 북한에서의 삶을 더이상 견디지 못한 탈북자들의 아리고 쓰라린, 상처투성이의 마음이 저절로 모여 쓴 시집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인간이 쓴 시집이 아니다. 詩가 쓴 시집이다. 도저히 숨죽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詩 스스로 인간에게 걸어나와 쓴 눈물의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워 읽기가 힘들었다. 먹먹한 가슴 속에 크고 날카로운 돌하나 박혀 빠지지 않는듯 해서 몇번이나 책장을 덮었다가 펼치기를 되풀이 했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 고 했는지 그 까닭을 다시한번 깊게 이해했다.
抒情(서정)은 시의 중요한 본질중 하나다. 나는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서정의 물기가 촉촉이 배어있는 시를 쓰려고 노력해 왔다. 서정이 있어야 시가 문학적 완성미를 지닌다는 믿음을 저버린적이 없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서정을 찾기가 어렵다. 서정도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일깨워 줄 뿐이다. 그동안 내가 쓴 시들의 서정이 이 시집 앞에서는 너무 사치스럽고 부끄럽다.
具體(구체) 또한 시의 중요한 구성 요소중 하나다. 나는 평소 시는 추상보다 구체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가능한한 구체의 힘에 의해 시를 쓰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시집에 나타난 구체의 힘 앞에서 그동안 내가 쓴 시의 구체는 참으로 초라하다. 이 시집은 장진성씨가 겪은 체험의 구체적 힘 만으로도 읽는 이의 가슴을 벼랑끝에 세운다.
이 시집을 다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한마디는 바로 ‘生存(생존)’ 이다. 그리고 또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면 바로 ‘밥’이다. 생존과 밥은 동질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밥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는 생명, 즉 밥이 없다. 밥에 대한 절망의 처절한 부르짖음만 있다. 밥이 없기때문에 생존하지 못하고 하루 하루 죽음의 고통 속에서 나뒹구는 모든 상황이 적나라하다.
시 한편 한편마다 생존에 대한 갈망과 자유에 대한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그저 옷깃을 여밀수 밖에 없다.
이 시집은 전체 5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 3부까지 40여편의 시가 온통 밥과 굶주림, 그 굶주림에 의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가감 첨삭 없이 드러 낸다. 「우리의 밥은」 「밥알」 「밥이 남았네」 「우리는 밥을 먹는다」 「밥이라면」 등 밥이라는 낱말 자체가 그대로 시의 제목이다.
이들 시들은 굶주림에 의해 생존을 위협당하는, 아니 결국 생존하지 못하고 畜生(축생)처럼 죽어간 참상을 노래한다. 300만명이 굶어 죽은, 이 참상앞에 굶주림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남한의 시인인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밀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밥은 / 쌀밥이 아니다 / 나무다 / 나무껍질이다 // 우리의 밥은 / 산에서 자란다 / 바위를 헤치고 자라서 / 먹기엔 너무 아프다 (「우리의 밥은」부분).
이 시는 밥에 관한 序詩(서시)격의 시다. ‘밥이 나무껍질’ 이라고 말하고 있고, 밥이 논에서 자라지 않고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먹기엔 너무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쌀을 배급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초근목피해야 하는 이런 상황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전개 되고 너무 사실적이어서 마치 한장면 한장면 동영상으로 찍은 듯하다.
쌀이 없는 집이여선지 / 그 집엔 숟가락이 없다 (「숟가락」 부분).
멀건 죽물에 쌀알이 얼마나 섞인다고 어머니는 매끼마다 쌀 다섯알씩 절약 하셨네
알알이 모아지고 한줌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밥을 지으셨네 나에게 생일 밥 차려 주셨네
더운밥 목메어 세어보니 어머니가 그동안 못드렸던 450개 밥알이었네
(「밥알」 全文).
옥수수 몇알씩 놓고도 우리는 말한다 밥 먹자고
씁쓸한 나무껍질 씹고도 우리는 생각한다 밥 먹었다고
소금탄 맹물 한숨에 마시고도 그것도 밥이라고 한다
밥 그 말 조차 없다면 먹은 날이 없기에
(「우리는 밥을 먹는다」 全文).
이 詩들은 굶주림에 의해 생존의 기로에 서 있어 보지 않은자는 쓸수 없는 시다. 일찍이 우리 시에 ‘밥이 먹고 싶다’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이 본능적 사실을 이토록 처절하게 노래한 시들이 있었던가. 굶주림이 이러한 시를 낳았으나 이런 시는 애초부터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시가 아니던가.
왜 집에 숟가락이 없겠는가. 먹을 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밥 먹을 숟가락을 한줌 밥을 먹기위해 팔아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끼니마다 다섯알씩 쌀을 모으는 어머니의 심정을, 그 쌀로 생일 밥을 받은 아들의 심정을 남한에 사는 배부른 우리가 어떻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옥수수 몇알을 먹고도, 나무껍질을 씹고도, 소금탄 맹물을 마시고도 밥을 먹었다고 말하는 상황, 즉 밥이라는 말로 밥을 먹는 상황을 나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영남이는 오늘도 배고픈 우리에게 큰 소리로 자랑했다 자기는 어제도 그제도 밥 세끼 먹었다고
애들은 소리내어 웃었다 한끼면 몰라도 새하얀 쌀밥을 세끼나 먹었다는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全文).
밥이라면 시퍼런 풀죽으로만 알던 아이 생일날 하얀 쌀밥 주었더니 싫다고 발버둥 치네 밥 달라고 내가슴을 쥐어 뜯네
(「밥이라면」全文).
옥수수 하나 손에 쥐고 총에 맞아 죽은 아이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게 자랑이 되는 현실, 또 그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다아는 현실은 그 얼마나 비극적인가?
쌀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시퍼런 풀죽만 먹던아이가 생일날 하얀 쌀밥을 줘도 싫다고 밥달라고 발버둥 치는 모습에서는 더 이상 시집을 읽어나갈 수 없다. 그러나 시집은 ‘밥이 사람을 잡아먹는 이땅’이라고 노래하며 굶주림에 의해 인민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으로 계속 이어진다.
꿈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간밤에 밖으로 달려 나갔을까
꿈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총을 쏘는 군대도 무서워 안했을까
꿈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손에 그것을 꼭 쥐고 죽었을까
그 꿈은 죽으면서도 놓지 않은 그꿈은 작은 옥수수 하나
(「아이의 꿈」 全文).
이렇게 옥수수하나 손에 쥐고 총에 맞아 죽은 아이, ‘제 목숨 하나 덜면 / 밥 한술 남는다며’ 사과나무에 스스로 목을 맨 손녀, ‘시체조’에 의해 역전마다 열차가 도착하면 죽어 나가는 사람들, 학생들에게 ‘굶어도 배워야 한다고’ 애타게 호소하다가 죽어간 백발교수, ‘눈 감겨줄 / 작은 손도 없어 / 제 그림자 깔고 / 여기 저기 / 누워있는 시체들’ 등 시인이 목격한 죽음의 참상은 참혹하다.
더구나 시인은 자신도 살인자라고 말한다. ‘출근할 때 / 눈물밖에 가진게 없어 / 동냥 손도 포기한 사람앞을 / 악당처럼 묵묵히 지나쳤다 / 하여 퇴근할땐 / 그사람은 죽어있었으니’ 시인은 ‘스스로의 심판에 / 이미 처형 당한몸’ 이라는 것이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냥 지나친 것에 불과한데도 그 자체가 이미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인식은 시인이 이 시를 쓰게된 깊은 내면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시인의 이러한 깊은 사랑과 自責(자책)은 김일성시신을 보관한 금수산 기념궁전에 대해 이렇게 분노한다.
그 궁전은 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수조원을 벌려고 억만금을 들인것도 아니다
죽은 한사람 묻으려고 삼백만이 굶어 죽는 가운데 화려하게 일어서 우뚝 솟아서
누구나 침통하게 쳐다보는 삼백만의 무덤이다
(「궁전」 全文).
아침까지‘얼어 죽지않고 자는법’
‘삼백만의 무덤’ 이 궁전으로 불리는 나라. 그나라에서 시인의 눈은 인민들의 삶의 구석구석을 그려내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아침까지 ‘얼어 죽지않고 자는법’은 ‘페트병에 더운물 채우고 / 이불 안에 넣고 자는’ 것이라며 ‘이 혹한에도 / 시민들은 집에서 안잔다 / 페트병안에서 잔다’고 고발한다.
또‘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라는 글씨가 써진 ‘종이를 목에 건채’시장에 서있던 벙어리 여인이 ‘한 군인이 백원을 쥐어주자 / 딸을 판 백원으로 / 밀가루빵 사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 - 용서해라!’ 하고 통곡하는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이런 비극의 참상은 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시집은 유엔에서 보낸 救濟米(구제미)가 원산항에 도착하자 ‘태극기를 내리기 전엔 / 쌀 한톨도 못받겠다’ 고 ‘정부가 단호히 거절하여서 / 고마운 동족의 큰배’가 오지 못한 일에 대한 안타까움도 이야기하고 공개처형 당하는 인민의 슬픔도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굶주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도 대중 앞에서 누군가 또 공개처형을 당한다
절대로 동정해선 안된다 죽었어도 격분으로 또 죽여야 한다
포고문이 다하지 못한 말 총소리로 쾅쾅 들려주는 그앞에서
어째서 인가 오늘은 사람들의 침묵이 더 무거웠으니 쌀 한가마니 훔친 죄로 총탄 90발 맞고 죽은 죄인
그 사람의 직업은 농사꾼
(「궁전」부분).
아, 정부가 배급해 주지않는 ‘쌀 한가마니 훔친죄로’ 공개처형 당한 한 농사꾼의 피눈물은 누가 닦아 줄 수 있을까?
나는 먼저 이 시를 쓴 詩人의 손이 그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을 본다. 그것이야말로 두만강을 건너 脫北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이 시집 원고 뭉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녀온 까닭이 아닐까?
시인은 북한을 탈출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되었다. 시인은 조국을 버리지 않았으나 시인의 조국은 시인을 버렸다. 그리하여 시인은 남한에 와서 지금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탈북자 우리는 먼저온 미래조, 오고야말 통일을 미리 가져온 현재
(「탈북자」부분).
나는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 시를 소중히 가슴에 품는다. 그가 진정 ‘먼저온 미래’ ‘통일을 미리 가져온 현재’가 되기 위해서는 北도 변해야 하고 南도 변해야 한다.
특히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눈치만 보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한정부는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존의 밥, 자유의 밥 한그릇을 위해 짐승처럼 죽어간 북한의 인민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우리들이 배불리 한끼 밥을 먹을 때, 우리는 굶주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탈북시인 장진성이 이 시집을 굳이 남한에서 펴낸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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